가까이 하다a
[d'y:(3045, 야다)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동의어] (관련성구)
a/B(935, 보)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
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60회 나오며, 칼형, 히필형,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보(a/B , 935)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공간상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들어가다'라는 의미는 창 7:7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동사의 사역형 어간은 '들어가게 하다', 혹은 '데리고 들어오다(창 6:19, 한글개역 - "이끌어 들여")', 혹은 '이끌어 오다, 가져오다'(창 2:19, 이 단어의 최초의 용례)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창 10:19의 '네가 소돔까지 갈 때'(KJV; "소돔을 지나" - 한글개역) 어구에서 더욱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동사는 '오다'라는 의미와 '돌아오다'라는 의미 둘 다로 사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 땅으로 "왔다"(한글개역 - 땅에 "들어 갔다", 창 12:5).
한편 신 28:6에는 하나님께서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건한 자들을 축복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해가 '지는 것'을 나타낸다(창 15:13).
이 단어는 '조상에게 돌아간다'(창 15:15)는 의미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특수한 용례는 '아내에게 들어가는 것' 혹은 '동거'(창 6:4)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선지자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한다(삼상 2:31).
마지막으로 이 동사는 거짓 선지자가 그 말대로 이적과 같은 그런 사건을 '이루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신 13:2).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천사(삿 6:11)나 다른 육신을 입은 존재(참조, 창 18:14)를 통해 '오신다', 그는 꿈(창 20:3)이나 다른 실제적인 현현(출 20:20)을 통하여 인간에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출애굽 동안에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 가는 구름과 불 속에서 '나타나셨다'(출 19:9).
둘째로,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그에게 합당하게 예배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신다(출 20:24). 블레셋인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고 느꼈다(삼상 4:7). 공식적인 예배와 관련된 용법은 시 24:7에 나온다. 여기에는 영광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시온의 문이 열리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겔 43:2에 묘사되어 있는 새 성전으로 '돌아 오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일단의 예언적 묘사가 있다.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오심'에 대한 찬송(참조, 신 33:2)에서 기원한 것 같다. 시편(예: 시 50:3)과 예언서(예: 사 30:27)에는 여호와께서 심판과 축복으로 '오신다'고 언급되어 있다 - 고대 근동 신화에서 차용한 시적인 어투이다(참조, 겔 1:4).
보(a/B , 935)는 또한 메시야의 '오심'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슥 9:9에는 메시야 왕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묘사되어 있다. 어떤 구절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는 창 49:10이 그러하다. 또 다른 난해한 구절은 겔 21:27이다: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동사 보를 사용한 매우 유명한 예언은 인자의 '도래'에 관한 것이다(단 7:13). 끝으로 마지막 날의 '도래'(암 8:2)와 여호와의 날의 '도래'(사 13:6)가 있다(넬슨의 구약해설).
보(a/B , 935)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성소에 오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신 12:5, 신 31:11, 삼하 7:18, 사 30:29, 렘 7:2, 렘 7:10, 시 5:7, H8, 시 42:2, H3). 제사장들이 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규정을 이행해야 했는데 반해(출 28:29이하, 출 29:30 등),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시 15편, 시 24편). 이방인들도 기도하러 올 수 있었으나(왕상 8:41), 환관은 제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신 23:1, H2). 백성들이 성소에 올 때, 그들은 제사장들에게도 갔다(신 17:9).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 물으러 선지자에게 갔다(예: 왕상 14:3, 왕상 14:5, 왕하 4:42, 겔 14:4, 겔 14:7).
(참조: E. A. Martens).
[동의어] (관련성구)
[g'n:(5060, 나가)
닿다, 대다, ~에 이르다(도달하다), 치다
나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닿다, 대다, 만지다, ~에 이르다(도달하다), 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5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나가는 '닿다, 대다, 접촉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어떤 것(혹은 사람)이 다른 것(사람)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사물과 사물이 닿음, 즉 접촉함(사 6:7, 사 16:8, 호 4:2, 왕상 6:27), 사람과 사물이 접촉하는 것(출 19:12).
이 단어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지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한 천사가 다니엘을 만져서 그를 자기 발 아래 두었다(단 8:18). 이사야가 여호와의 위엄을 보는 환상 중에 한 천사가 그 선지자의 입술에 숯을 대었다(사 6:7).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말을 전해줌을 상징하고 그 선지자가 구술 사역을 할 수 있는 준비를 묘사하기 위해 선지자의 입에 손을 대셨다(렘 1:9).
삼상 10:26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새로 선택한 왕을 지지하기 위해 몇몇 용감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을 묘사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사물에 접촉하시거나 만지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땅을 만져 녹게 하시고(암 9:5), 산을 만져 연기가 나게 하신다(시 104:32, 시 144:5). 종종 하나님의 만지심은 유익하며,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사 6:7, 단 10:16, 렘 1:9). 하나님이 만지시는 것은 그것이 산이든(시 104:32, 참조: 암 9:5), 제물이든(삿 6:21, 참조: 삼하 23:7), 사람이든 간에(왕상 19:7, 삼상 10:26) 항상 권위가 있다.
이 단어는 부정한 것이나 신성한 것의 접촉이나 만짐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거룩의 기본 개념에 따라 그의 백성들에게 부정한 것(예: 민 19:16, 민 19:22, 사 52:11)과 성별된 신성한 것(출 19:13, 민 4:15, 참조: 레 12:4, 학 2:12-13)을 만지는 것을 금하셨다. 여호와는 거룩하시므로 자신을 위하여 특별한 것을따로 구별해 두신다. 그러한 물건들은 하나님에게만 바쳐지며, 스스로 정결케 된 자들(예: 제사장들)만이 그것들을 만질 수 있다. 오염은 전염되는 것이므로(그러나 거룩은 그렇지 않음, contra Durham, 264-65, 참조: 학 2:12-13)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거룩, 즉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서의 성별된 상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이 단어는 다른 특별한 용법으로 동거나 성적관계를 나타낸다. 창 20:6에서 아비멜렉은 사라를 건드리지("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잠 6:29에서 음녀에게 가까이 하는(가서 관계를 가지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b) 나가는 '치다, 타격이나 해를 가하다, 괴롭히다, 성가시게 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그것은 농작물을 마르게 하거나(겔 17:10) 건물을 붕괴시키는(욥 1:19) 바람의 강력한 타격에 대해 사용되었다. 보아스는 일군들에게 룻을 "건드리지"(RSV '성가시게 굴다', '간섭[방해]하다' molest) 말라고 명령한다(룻 2:9). 아비멜렉은 백성에게 이삭과 그 아내를 괴롭히지못하도록 경고한다(창 26:11, 창 26:29). 기브온인과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언약의 상대자들을 괴롭히거나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수 9:19).
나가는 군사적 충돌의 충격에 대해 사용되었으며(수 8:15), 하나님이 보내신 고통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호와의 "치심"에 대한 욥의 경험이 동정을 구하는 그의 절망적인 외침의 원인이 된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 19:21, 참조: 욥 1:11, 욥 2:5). 욥은 여기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불평한다. 여호와는 또한 질병과 재앙으로 이방의 통치자들을 치시고(창 12:17, 참조: 삼상 6:9) 불순종하는 언약의 중개자들을 치신다: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왕하 15:5 = 대하 26:20). 아삽은 자기 주변에 있는 악인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치심을 당하지 않았다고 불평한다(시 73:5). 방관자들은 고난 받는 종 메시야가 하나님께 응당 받을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사 53:4).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의 선지자들을(대상 16:22), 그의 백성들을(슥 2:8), 혹은 그의 유업(산업)을(렘 12:14) 만지거나 다치지 못하게 금했다. 이들은 거룩하며 하나님께 속한다(참조: 제의적 용법). 그러나 야곱이 치심을 받아 평생 절름발이가 된 것은 유익한 일이었다(창 32:25, 창 32:32).
(c) 나가는 공간적 의미로 '~에 까지 미치다, 이르다, 접근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계곡(슥 14:5)이나 초목(사 16:8, 렘 48:32)의 지형적 범위를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성질 때문에("마음에 까지 미치느니라", 렘 4:18, 참조: 미 1:9), 이스라엘의 안전감은 근거가 없다. 그들은 평화를 기대하지만 칼이 목구멍을 찌르려 한다(렘 4:11). 시 88:3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구절인데,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와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를 병행시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게 하셨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하는 것이다(참조: 시 107:18).
나가는 과장법으로 사용되어 감정의 강도(대하 28:9),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청난 양("하늘에 미쳤고", 렘 51:9, 참조: 신 1:28), 야곱의 꿈에서 사닥다리가 무한정 뻗쳐 있는 듯한 모습(창 28:12)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d) 나가는 사람(삼상 14:9, 에 4:14, 사 30:4), 동물(단 8:7), 전갈(욘 3:6), 왕의 칙령(에 4:3, 에 8:17, 에 9:1), 재난(삿 20:34, 삿 20:41, 욥 5:19, 시 32:6)의 도래나 다가옴, 혹은 특정한 때의 도래(스 3:1, 느 7:72, 전 12:1, 아 2:12, 겔 7:12)나 기간의 도래(에 2:12, 에 2:15)를 나타내기도 한다.
(e) 나가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사용되었다(에 9:26, 전 8:14, 시 32:6).
(참조: R. K. Harrison; I. Swart; L. G. Coppes; BDB).
[동의어] (관련성구)
vg'n:(5066, 나가쉬)
가까이 끌어당기다, 접근하다
나가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까이 끌어 당기다 draw near, 접근하다 approach'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대상에게 매우 가까이 근접하여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어근과 매우 비슷한 말인 카라브(br'q; , 7126)와 달리, 나가쉬는 실제적인 접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5회 나오며, 칼, 니팔, 호팔,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나가쉬의 단순 용법은 근접, 즉 만지거나(창 27:21, 창 29:10), 먹거나(창 27:25), 입맞추거나(창 27:27), 포옹할(창 48:10)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움을 나타낸다. 군사적 문맥에서 사용될 경우에(참조: 카브) 이 단어는 종종 '싸우다'(to do battle)라는 말을 동반한다. 삿 20:23 "나아가서...싸우리이까", 대상 19:14 "싸우려고...나아가니".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욜 3:9, H4:9에서는 나가쉬 자체가 전쟁할 채비를 하는 것을 나타낸다: "너희는 열국에 이렇게 광포할찌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무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찌어다".
삼상 17:16, 삼상 17:4에서 '가까이 나아가다'를 나타낸다.
나가쉬는 또한 실제적 교전과 전쟁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겔 9:6에서 이마에 타우(?)표를 가진 택한 자는 살해하지("가까이")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암 9:10에서 죽음(칼)이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교만하게 떠버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주권적 언약자인 하나님께서는 칼을 인도하고 다스리어 심지어 전쟁 중에서도 택한 자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며(시 91:7) 그리고 악인을 벌하신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나사쉬는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로 그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 다가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창 43:19, 창 45:4, 왕하 5:13).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자기 백성 중에서 나온 왕은 종말에 당신에게로 그렇게 접근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0:21).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그에게 가까이 나아간다(렘 42:1, 참조: 에봇을 사용함, 삼상 23:9, 제비를 뽑음, 삼상 14:38). 이 어근은 하나님을 왕과 재판관으로 나타낸다.
때때로 하나님의 종에게 다가가는 것과 하나님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 사이에 판별하기가 어렵다(참조: 수 14:6, 수 21:1). 그러나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 즉 소송을 다루기 위해 마련된 법정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입증된다(창 18:23).
하나님께서는 와서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인간들을 부르신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수 3:9).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문책하기 위해 법정에 대한 이런 비유적 표현을 설득력 있게 사용한다(사 41:1, 사 41:21, 사 45:20-21). 하나님의 종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그의 옹호자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죄(과오)가 입증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사 50:8).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자기 백성 위에 앉으시며(수 3:9), 자신을 대표하여 재판권을 행사할 인간을 임명한다(출 24:14, 신 25:1).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와 논쟁할 때 백성들을 증인으로 소환한다(왕상 18:30).
인간들은 또한 크시고 거룩하신 구주로서 크신 왕이시자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제의적으로 사용된다. 본래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결해야 하며(출 19:22, 출 20:21, 출 28:43, 출 30:20, 레 21:21) 지정된 대로 따라야 한다(예: 민 4:19). 이 단어는 카라브(br'q; , 7126)와 상호 교체되어 나온다. 카라브(br'q; , 7126)는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것(레 8:14)과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레 2:8) 모두를 나타낸다.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렘 12:2, 카라브) 사 29:13에서도 그렇다.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나 마음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신다고 선언한다.
말라기는 이 단어를 6회, 언제나 '제물을 드리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예: 말 1:7-8).
나카쉬는 출 19:15에서 성적 관계에 대해 사용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참조: L. J. COPPES).
[동의어] (관련성구)
br'q;(7126, 카라브)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 들어가다, 가까이 당기다
카라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까이 오다 come near, 접근하다 approach, 들어가다 enter into, 가까이 끌어당기다 draw near'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객체(또는 주체)가 매우 가깝고 친밀하게 근접해 있거나 접근해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적 의미로는 객체와의 실제적 접촉 개념이 있다(겔 37:7, 겔 37:17의 피엘 명령형; GKC, 52n, 64h; 또한 아마 출 14:20, 삿 19:13 도).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8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카라브는 일반적으로 서로간의 친밀성의 개념도 없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를 의미한다. 창 12:11에서 이 단어는 공간적 근접성, 즉 공간적으로 어떤 것에 가까이 밀착된 상태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즉 이 동사는 주제가 객체, 곧 문제의 대상이나 사람을 볼 수 있고(출 32:29), 객체와 말할 수 있고(민 9:6) 혹은 객체를 만질 수도 있을 정도로(레 10:4, 출 36:2) 주체가 그 객체에 충분히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b) 카라브는 어떤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적인 근접성을 묘사한다. '카라브'는 종교적인 축제와 같은 즐거운 행사가 임박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신 15:9). 이 단어는 불길한 사건이 임박함에 대해 사용되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창 27:4).
(c) 카라브는 다양한 전문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용례에는 인격적 관계라는 개념이 있다. 즉 단순히 어떤 것(어떤 사람)에 근접해 있음이 아니라, 그것이나 그 사람에게 능동적이고도 인격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투를 묘사하는 문맥에서는 '무장투쟁'을 나타낸다. 신 2:37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의 땅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명하셨다. 그러나 신 2:19에서는 그 땅에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난해하게 보이는 이 내용은, 신 2:37이 전문적으로 싸우러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신 2:19은 일반적 접근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때 선명해진다. 이 군사적 의미는 신 25:11과 수 8:5에서도 분명하다.
어떤 구절에서는 이같은 군사적 의미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부주의한 독자들은 이를 간과하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미는 존재한다.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시 27:2). 시 27:3의 용례("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는 이 동사의 의미가 '접전하다'임을 입증해 준다. 시 91:10, 시 119:150도 보라.
(d) 카라브는 또한 전문적 용법으로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 관한 자기의 순결을 확언하는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창 20:4).
또한 신 22:14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가까이 나아가'("동침할 때에") 처녀성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였고, 사 8:3에서는 선지자가 자기 아내에게 '가까이 나아가'("동침하매") 그녀가 잉태했다고 기록되었다.
(e) 카라브의 전문적 용법에는 제의적인 용법이 있다. 이 경우 사람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림에 있어서 수행하는 각각의 모든 단계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모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다(출 3:5). 후에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그의 거룩한 산에 접근하면서 그와 동일하게 주의하였다(레 4:11, 신 5:23). 그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가까이 모여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만나(가까이 나아가)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요청하여 그 일을 위탁하였다(신 5:27).
그 후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와 만났다. 그들은 성막을 지을 재료를 가져와 하나님 앞에 헌물(고르반)로 드렸다.
레위인들은 성막의 관리인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가까이 나아가는) 헌물로 드려졌다(민 16:9, 민 18:4, 참조: 수 3:4).
한편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거룩한 희생제사의 유일한 제사장들로 바쳐졌다(참조: 레 10:3, 민 18:3, 민 18:22). 이러한 직무적 의미의 가까이 나아감에는 하나님에 의한 특별한 선택과 이스라엘에 의해 바쳐진다는 개념이 수반된다(출 29:4).
제사장들은 분부에 따라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 입으며 자신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순결(자신들을 범인들과 구별함)을 유지시켜야 했다(레 9:4, 레 9:8, 레 9:10).
흥미롭게도 히필 어간은 백성들에 의해(레 1:14), 제사장들을 통하여(레 1:5)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뜻으로 가장 빈도 높게 사용되었다(레 1:13). 이와 같이 제사장들에게 바쳐지는 것은 무엇이나 다 거룩하며 희생제사에서 불타지 않은(또는 파괴되지 않은) 모든 부분은 제의와 공적으로 관련된 자들에게 속한다(레 3:7).
이러한 공적 의미가 가장 의의 깊게 적용되는 곳은 렘 30:21이다. 여기에서는 장차 하나님의 왕(왕족?)이 제단에서 직무를 수행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보통 배교적 행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주정치에서 어떤 왕도 이를 행하지 않았다, 참조: 왕하 16:12)!
어려운 소송에서는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 앞에 나아왔다(성막에서, 레 9:5, 삼상 10:20이하).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비교해 보라. 제비 뽑기에 의한 재판으로 아간을 찾아낸 경우(수 7:14), 전쟁 수행 여부에 관한 결정(삼상 14:36),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한 백성들의 종말론적(그리고 영적) 회합(사 41:1, 사 48:16, 기타 등등).
이러한 제의적 의미가 카라브의 기타 용례들과도 관련된다. 예를 들면 애 3:57에서 탄원자가 부를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 즉 흔쾌히 도와준다고 언급한 경우이다(참조: 신 4:7, 시 34:18).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이 신실한 자들의 편으로 묘사된다(느 13:4, 창 45:10). 예를 들면 그의 이름(시 75:1, 시 119:151), 그의 구원(시 85:9), 그의 의(사 51:5) 등이다. 여기의 개념은 수동적(즉 가까움)이 아니라 능동적이다(즉 돕는 자, 자기편). 또한 인식론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가깝다(신 30:14).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서는 가까우나 마음으로부터는 멀다고 말한 내용도 아마 이러한 의미(그리고 제의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을 것이다(렘 12:2). 그리고 솔로몬의 경우도 아마 자기의 말을 계속적인 희생 제사로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 것이다(왕상 8:59).
(참조: NEDOT; L. J. COPPES).
[동의어] (관련성구)
hb;r;q](7132, 케라바)
접근, 가까이 나감
케라바(명여)는 카라브(br'q; , 7126)에서 유래했으며, '접근, 가까이 나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시 73:28, 사58:2).
(참조: HE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