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워지다
br'q;(7126, 카라브)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 들어가다, 가까이 당기다
카라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까이 오다 come near, 접근하다 approach, 들어가다 enter into, 가까이 끌어당기다 draw near'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객체(또는 주체)가 매우 가깝고 친밀하게 근접해 있거나 접근해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적 의미로는 객체와의 실제적 접촉 개념이 있다(겔 37:7, 겔 37:17의 피엘 명령형; GKC, 52n, 64h; 또한아마 출 14:20, 삿 19:13 도).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8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카라브는 일반적으로 서로간의 친밀성의 개념도 없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를 의미한다. 창 12:11에서 이 단어는 공간적 근접성, 즉 공간적으로 어떤 것에 가까이 밀착된 상태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즉 이 동사는 주제가 객체, 곧 문제의 대상이나 사람을 볼 수 있고(출 32:29), 객체와 말할 수 있고(민 9:6) 혹은 객체를 만질 수도 있을 정도로(레 10:4, 출 36:2) 주체가 그 객체에 충분히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b) 카라브는 어떤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적인 근접성을 묘사한다. '카라브'는 종교적인 축제와 같은 즐거운 행사가 임박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신 15:9). 이 단어는 불길한 사건이 임박함에 대해 사용되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창 27:4).
(c) 카라브는 다양한 전문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용례에는 인격적 관계라는 개념이 있다. 즉 단순히 어떤 것(어떤 사람)에 근접해 있음이 아니라, 그것이나 그 사람에게 능동적이고도 인격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투를 묘사하는 문맥에서는 '무장투쟁'을 나타낸다. 신 2:37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의 땅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명하셨다. 그러나 신 2:19에서는 그 땅에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난해하게 보이는 이 내용은, 신 2:37이 전문적으로 싸우러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신 2:19은 일반적 접근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때 선명해진다. 이 군사적 의미는 신 25:11과 수 8:5에서도 분명하다.
어떤 구절에서는 이같은 군사적 의미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부주의한 독자들은 이를 간과하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미는 존재한다.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시 27:2). 시 27:3의 용례("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는 이 동사의 의미가 '접전하다'임을 입증해 준다. 시 91:10, 시 119:150도 보라.
(d) 카라브는 또한 전문적 용법으로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 관한 자기의 순결을 확언하는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창 20:4).
또한 신 22:14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가까이 나아가'("동침할 때에") 처녀성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였고, 사 8:3에서는 선지자가 자기 아내에게 '가까이 나아가'("동침하매") 그녀가 잉태했다고기록되었다.
(e) 카라브의 전문적 용법에는 제의적인 용법이 있다. 이 경우 사람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림에 있어서 수행하는 각각의 모든 단계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모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다(출 3:5). 후에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그의 거룩한 산에 접근하면서 그와 동일하게 주의하였다(레 4:11, 신 5:23).그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가까이 모여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만나(가까이 나아가)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요청하여 그 일을 위탁하였다(신 5:27).
그 후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와 만났다. 그들은 성막을 지을 재료를 가져와 하나님 앞에 헌물(고르반)로 드렸다.
레위인들은 성막의관리인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가까이 나아가는) 헌물로 드려졌다(민 16:9, 민 18:4, 참조: 수 3:4).
한편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거룩한 희생제사의 유일한 제사장들로 바쳐졌다(참조: 레 10:3, 민 18:3, 민 18:22). 이러한 직무적 의미의 가까이 나아감에는 하나님에 의한 특별한 선택과 이스라엘에 의해 바쳐진다는 개념이 수반된다(출 29:4).
제사장들은 분부에 따라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 입으며 자신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순결(자신들을 범인들과 구별함)을 유지시켜야 했다(레 9:4, 레 9:8, 레 9:10).
흥미롭게도 히필 어간은 백성들에 의해(레 1:14), 제사장들을 통하여(레 1:5)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뜻으로 가장 빈도 높게 사용되었다(레 1:13). 이와 같이 제사장들에게 바쳐지는 것은 무엇이나 다 거룩하며 희생제사에서 불타지 않은(또는 파괴되지 않은) 모든 부분은 제의와 공적으로 관련된 자들에게 속한다(레 3:7).
이러한 공적 의미가 가장 의의 깊게 적용되는 곳은 렘 30:21이다. 여기에서는 장차 하나님의 왕(왕족?)이 제단에서 직무를 수행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보통 배교적 행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주정치에서 어떤 왕도 이를 행하지 않았다, 참조: 왕하 16:12)!
어려운 소송에서는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 앞에 나아왔다(성막에서, 레 9:5, 삼상 10:20이하).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비교해 보라. 제비 뽑기에 의한 재판으로 아간을 찾아낸 경우(수 7:14), 전쟁 수행 여부에 관한 결정(삼상 14:36),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한 백성들의 종말론적(그리고 영적) 회합(사 41:1, 사 48:16, 기타 등등).
이러한 제의적 의미가 카라브의 기타 용례들과도 관련된다. 예를 들면 애 3:57에서 탄원자가 부를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 즉 흔쾌히 도와준다고 언급한 경우이다(참조: 신 4:7, 시 34:18).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이 신실한 자들의 편으로 묘사된다(느 13:4, 창 45:10). 예를 들면 그의 이름(시 75:1, 시 119:151), 그의 구원(시 85:9), 그의 의(사 51:5) 등이다. 여기의 개념은 수동적(즉 가까움)이 아니라 능동적이다(즉 돕는 자, 자기편). 또한 인식론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가깝다(신 30:14).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서는 가까우나 마음으로부터는 멀다고 말한 내용도 아마 이러한 의미(그리고 제의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을 것이다(렘 12:2). 그리고 솔로몬의 경우도 아마 자기의 말을 계속적인 희생 제사로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 것이다(왕상 8:59).
(참조: NEDOT; L. J. COPPES).
[동의어] (관련성구)
vg'n:(5066, 나가쉬)
가까이 끌어당기다, 접근하다
나가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까이 끌어 당기다 draw near, 접근하다 approach'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대상에게 매우 가까이 근접하여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어근과 매우 비슷한 말인 카라브(br'q; , 7126)와 달리, 나가쉬는 실제적인 접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5회 나오며, 칼, 니팔, 호팔,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나가쉬의 단순 용법은 근접, 즉 만지거나(창 27:21, 창 29:10), 먹거나(창 27:25), 입맞추거나(창 27:27), 포옹할(창 48:10)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움을 나타낸다. 군사적 문맥에서 사용될 경우에(참조: 카브) 이 단어는 종종 '싸우다'(to do battle)라는 말을 동반한다. 삿 20:23 "나아가서...싸우리이까", 대상 19:14 "싸우려고...나아가니".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욜 3:9, H4:9에서는 나가쉬 자체가 전쟁할 채비를 하는 것을 나타낸다: "너희는 열국에 이렇게 광포할찌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무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찌어다".
삼상 17:16, 삼상 17:4에서 '가까이 나아가다'를 나타낸다.
나가쉬는 또한 실제적 교전과 전쟁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겔 9:6에서 이마에 타우(?)표를 가진 택한 자는 살해하지("가까이")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암 9:10에서 죽음(칼)이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교만하게 떠버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주권적 언약자인 하나님께서는 칼을 인도하고 다스리어 심지어 전쟁 중에서도 택한 자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며(시 91:7) 그리고 악인을 벌하신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나사쉬는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로 그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 다가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창 43:19, 창 45:4, 왕하 5:13).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자기 백성 중에서 나온 왕은 종말에 당신에게로 그렇게 접근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0:21).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그에게 가까이 나아간다(렘 42:1, 참조: 에봇을 사용함, 삼상 23:9, 제비를 뽑음, 삼상 14:38). 이 어근은 하나님을 왕과 재판관으로 나타낸다.
때때로 하나님의 종에게 다가가는 것과 하나님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 사이에 판별하기가 어렵다(참조: 수 14:6, 수 21:1). 그러나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 즉 소송을 다루기 위해 마련된 법정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입증된다(창 18:23).
하나님께서는 와서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인간들을 부르신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수 3:9).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문책하기 위해 법정에 대한 이런 비유적 표현을 설득력 있게 사용한다(사 41:1, 사 41:21, 사 45:20-21). 하나님의 종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그의 옹호자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죄(과오)가 입증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사 50:8).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자기 백성 위에 앉으시며(수 3:9), 자신을 대표하여 재판권을 행사할 인간을 임명한다(출 24:14, 신 25:1).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와 논쟁할 때 백성들을 증인으로 소환한다(왕상 18:30).
인간들은 또한 크시고 거룩하신 구주로서 크신 왕이시자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제의적으로 사용된다. 본래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결해야 하며(출 19:22, 출 20:21, 출 28:43, 출 30:20, 레 21:21) 지정된 대로 따라야 한다(예: 민 4:19). 이 단어는 카라브(br'q; , 7126)와 상호 교체되어 나온다. 카라브(br'q; , 7126)는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것(레 8:14)과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레 2:8) 모두를 나타낸다.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렘 12:2, 카라브) 사 29:13에서도 그렇다.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나 마음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신다고 선언한다.
말라기는 이 단어를 6회, 언제나 '제물을 드리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예: 말 1:7-8).
나카쉬는 출 19:15에서 성적 관계에 대해 사용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참조: L. J. COP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