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PLURALISM
정의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상이한 의미의 두 가지 기초를 갖는다. 첫째, 종교적 다원주의는 단순히 특별한 시대의 특별한 문화 속에 있는 종교적 다양성—종교적 획일성에 반대하는 것으로서—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는 용어의 서술적 의미다. 종교적 다원주의의 두 번째 이해는 용어의 규범적 의미다. 이런 이해 속에 있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세상의 모든 주요 종교가 하나님에 이르는 동등한 접근 방법을 제공한다는 사상이다.
● 종교적 다양성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좋은 예는 오늘날의 미국으로, 1776년 이 이론이 창설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종교적으로 다원화 되었다. 당시 미국인 대부분은 개신교 교파에 속해 있었으며, 다른 종파들, 즉 로마 가톨릭, 유대교, 이신론과 회의론에 대해 그저 수박 겉핥기 정도의 지식을 가졌을 뿐이었다. 다원주의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더 많은 미국인이 여전히 다른 종파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와 문화는 여타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미에서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이 미국이 어느 정도 다원적이냐에 대하여는 쟁론할지 몰라도, 다른 어떤 역사적 시기보다 오늘날 미국에 더 많은 무슬림, 불교도, 힌두교도들이 있다(그들은 더 높은 인구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하나의 종교적 전통만 인정하거나 혹은 아무런 종교적 전통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며, 대신에 스스로의 믿음에 둘 혹은 그 이상의 신앙과 예배를 받아들임으로써 종교적으로 다원화 되어가고 있다. 가령 그리스도인으로 자란 여성이 기독교 전통의 많은 것을 수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명상에서 평온함을 찾을 수도 있다. 그녀는 기독교 예배와 불교의 독경 법회에 모두 참석할지도 모른다.
● 세상의 모든 주요 종교가 하나님(혹은 신성한 것)에 이르는 동등한 접근 방법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좀 더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신성한 것이라는 용어를 포함한 것은 일부 세계 종교(불교와 같은)가 이신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이 아닌, 그러나 신성한 실재는 믿는다고 확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어느 종교도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어떠한 영적 우위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뜻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를 영적 스승으로 애호하지만, 종교적 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영적 자유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붓다와 마호메트 역시 영적 접근의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종국에는 아마도 편협하고 자신의 종교적 이해를 광신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성경의 선교에 대한 명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요청하지만, 그것은 결코 무력이나 위협을 변화의 수단으로 승인하지 않는다(마 28:18–20). 그런 점에서 성경은 다원주의의 서술적 의미를 허용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이르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가져다주는 일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했을 때, 그의 시대의 서술적 다원주의를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5–6).
성경은 규범적 의미에서의 종교적 다원주의를 거부한다. 참 하나님은 초월적인 실재에 접근하는 방법을 얻는 여러 가능한 길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 말며, 모든 우상을 멀리할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신다(출 20:1–6; 요일 5:21). 세상에는 왜곡하는 죄의 영향 때문에 거짓 종교들이 많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새로운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선포한 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한 행 4:12을 보라).
적용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고 했다(마 5:13–16).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는 선을 수호하고,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모든 성경을 소개해야 한다. 다원적인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는 단지 영적 자유함에 이르는 여러 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비할 데 없는 유일한 구원의 원천임을 성실하고 현명하게 확증해야 한다(딤전 2:4). 이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과 왜 그것을 믿는지를 깊이 알아야 한다(벧전 1:5–6; 유 3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다원주의와 섞이기 쉬울 것이며, 복음의 빛을 비추는 대신 유행하고 있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요일 2:15–17).
다원적 환경 속에서, 교회는 다른 종교들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특수성에 대해 수업할 수 있다. 적절하다면 목사의 설교는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기독교의 교리가 어떻게 특별한 차이를 갖는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다른 종교의 기본적인 신앙과 다른 신앙 체계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누구도 강요하기를 원치 않으며, 다른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기를 원치 않는 불신자들과 소통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미국의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에 명시된 종교적 자유를 승인하고 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도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다원적 환경을 다른 믿음을 소유한 이웃과 친구, 가족에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복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악한 것들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요 8:44; 고후 4:4), 우리의 모든 복음 전파의 노력은 성경의 지식과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강렬한 기도를 요청한다(엡 6:18; 살전 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