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사전 - 고난 SUFFERING

 고난 SUFFERING



정의


고난은 심각한 상실, 손상, 고통, 시련 혹은 개인이나 일단의 사람들의 죽음의 경험이다. 고난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한 자녀를 폭력적인 죽음으로 상실한(창 4:8) 이래 인간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으며,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계 7:15–17).

성경은 고난이 극심했던 수많은 개인 즉 욥, 시드기야(왕하 25:7), 헤롯(행 12:23)뿐만 아니라 끔찍한 고통을 당했던 일단의 사람들, 즉 기근을 당한 야곱의 일가(창 41:56–42:2), 바벨론의 포위 아래 있었던 예루살렘의 사람들(대하 36:17), 예루살렘의 초대 교인들(행 11:28, 24:17), 적대적인 배경 속에서 살았던 1세기의 신자들(행 8:1; 벧전 1:6)을 기록하고 있다.

고난은 많은 이유에서 믿는 자들의 관심 있는 주제이지만, 고난의 상황은 가장 많은 논의를 부추기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을 야기한다. “왜 고난이 생겨나는가?” 세상에서 고난의 실재는 회의론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하는 데 이르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주된 장애물이다. “신정론”은 세상에 실재하는 고난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선함을 방어하기 위한 신학 내에 있는 특별한 영역이다. 성경은 세 영역에서 고난에 대한 주요 가르침을 제시한다. 즉 욥기서, 예수의 고난 이야기, 그리고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들 각각의 이야기를 검토함으로써 고난을 이해할 수 있다.


  ●      〈욥기〉 는 ‘욥’이라고 불리는 의로운 사람의 거의 상상할 수 없고 전례가 없는 고난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익명의 저자에 의해 두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기록되었다. 우선 저자는 욥과 그의 친구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신앙이 단지 그의 번영 때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유형의 고난으로 욥을 괴롭게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욥 1:8–12). 둘째 차원에서 우리는 욥의 깊은 상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곤혹스러움, 그리고 욥의 상실감을 이해하거나 욥에게 위로를 주려 했던 욥의 친구들의 전적인 무익함을 읽게 된다. 욥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고난 뒤에 있는 참된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심지어 우리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도 참된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다. 고난이 항상 악함에 대한 형벌의 표현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고난당하는 자를 위한 가장 큰 위로의 원천은 우리가 섬기고 예배하는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가 고난당할 때조차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아는 것이다(욥 38–41장; 벧전 4:19).

  ●      예수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크게 고난당하셨다. 예수의 고난은 복음의 핵심이다(히브리서 2:10). 복음서의 거의 절반이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하며, 극심한 고난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생애 마지막 주간의 일을 상술하고 있다(마 26:37–39, 27:27–31, 45–50). 예수는 비록 죄가 없었지만 그의 몸 안에 우리의 죄를 지고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벧전 2:21–25).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다시금 고난이 고난 받는 자의 죄 지음과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고난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위대한 성과를 가질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벧전 1:10–11).

  ●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박해의 형태로 고난을 당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고난이 믿는 자들의 소명의 일부일 수 있다고 편지했다(벧전 2:20). 믿는 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신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벧전 4:13), 이 주제는 또한 바울의 편지에서도 언급되었다(골 1:24).



적용


고난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원리에 더하여, 성경은 또한 우리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고난당하는 동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인간의 고난 뒤에 있는 가능한 요인들에 대해 일부 부가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이런 고난의 이유들 가운데 일부는 원인적(뒤를 돌아보는)이며, 일부는 목적적(앞을 내다보는)이다.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단 4:28–33), 훈련의 방식(히 12:4–11), 또는 성숙을 촉진하기 위한 자극(고후 12:7; 벧전 1:6–7; 약 1:2–4; 롬 5:3–5)일 수 있다. 또한 고난은 마치 아기의 출생의 기쁨에 참여하는 해산의 고통처럼(롬 8:18–27) 보다 큰일을 위한 전조일 수 있다. 고난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관계함으로 치르는 값일 수도 있다(요 15:20).

믿는 자들이 인간의 고난에 대하여 또 다른 어떤 태도를 길러야 하는가? 우리는 구세주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 공생애 사역 초기에, 예수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보게 함과 자유, 구원,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가져다주기 위해 영광으로부터 왔노라고 담대하게 선언하셨다(눅 4:18–19). 예수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태도와 행위가 예방할 수 있는 고난을 직면해야만 하는 본보기로 무수한 형태의 인간의 고난을 밀어내셨다(막 1:32–34). 우리가 피하거나 방지할 수 없는 자연 재해로 커다란 고난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런 재앙을 당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누가복음 4장에서 발견하는 예를 든다면,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예방할 수 있는 고난에 대한 더욱 큰 책임이 있다. 인신매매, 전쟁 혹은 집단 학살과 같은 인간이 만든 재앙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우리가 공의로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려(미 6:8) 할 때 막대한 수준의 고난을 가한다.

성경은 믿는 자들이 고난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일부이며, 우리의 유한함과 운명의 일부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신다. 우리가 겸손함과 민감함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때때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일생 가운데 언제나 인간의 고난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보장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