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원어사전 구약 - "가다a"

  

가다a

&l'y:(3212, 얄라크)

가다, 오다, 걷다

 

얄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go, 오다 come, 걷다 walk'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50회 나온다.

얄라크는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움직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다양한 문맥에서 여러가지 의미(17:7도 포함)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37:13, 37:20, 19:32,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8:3, 8:5, GKC, 113u를 보라),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27:14, 50:18, 왕하 3:7, 2:3)에 주목해야 한다.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다님' creeping(3:14), 여우의 '노님' prowling(5:18), 배의 '항해' sailing(7:18), 물의 '흐름' flowing(2:14), 나팔 소리의 '커져감' llaying(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2:11), 이슬(6:4), 바람(78:39), 슬픔(16:6), 인간의 생명(15:2, 23:14) 등의 ''을 의미한다.

이 동사는 가상적인 신(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Frank Schnutenhaus, "Das Kommen und Erschinen im Alten Testament", ZAW 76:1-12),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얄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18:33). 아마도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콜(qol: 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 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얄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 33:14,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얄라크로 표현됨. 참조, 3:6, 10:32-36).

배교는 그들이 다른 신이나 거짓 신을 '좇는다'(32:1, 5:23)거나, 자기 자신의 악한 꾀(7:24, 1:1)나 악한 마음(11:8)을 추구하거나 어둠 속에 행하는 것으로(9:2)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26:24).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왕상 3:14, 119:1 이하). 이 개념은 얄라크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체다코트[33:15] 등과 같이 단어 아하레와 함께 쓸 필요가 없다). 히트파엘형은 이와 관련하여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좋은 예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있다(5:22, 6:9, 17:1). (L. J. Coppes).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hy:h;(1961, 하야)

~이 일어나다, ~이 되다, ~이다

 

하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이 일어나다, 발생하다, ~이 되다, ~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500여회 나온다.

 

하야(hy:h; , 1961)는 히브리어 성경에 3,540회 나오는데 그 중 21회는 니파형으로, 나머지는 칼형으로사용되어 있다. 이 동사는 '되다' to become를 의미하는 다른 히브리어 단어 하와(aw:h; , 1933, 단지 5회 나옴, 27:29, 16:4, 2:22, 11:3, 6:6), 그리고 아람어 성경에 있는 동일한 동사 하와(aw:h: , 1934, 71)와 관련되어 있다. 아카드어에 있는 음성상의 상당어 에우(ewu)'스스로...이 되다', '...처럼 되다'를 의미한다. 아카드어에서는 존재함을 표현하기 위해 에우(ewu)가 아닌 바슈(bashu)를 사용한다(우가릿어에서도 이와 비슷하며 페니키아어에서는 군[kun]을 사용한다).

 

구약성경에서 하야(hy:h; , 1961)가 단순히 존재함을 나타내거나 사물이나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사실은 흠정역 성서(KJV)의 아무 페이지나 흘끗 훑어 봄으로써 쉽게 알 수 있다. 이 성경에서 우리는 이텔릭체로 쓰여진 'is, are, was, were'와 같은 단어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번역자들이문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하여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단어들을 첨가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한 경우에 히브리어에서는 문법적으로 명사 문장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동사나 연계사(be동사)가 없어도 하나의 문장으로 간단히 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I (am) the Lord your God(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the Lord (is) a sun and shield(여호와는 태양[]요 방패[이시다]), the land is good(그 땅은 좋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blessed (are) the poor(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연계사나 존재를 나타내는 불변사로서의 하야(hy:h; , 1961)가 거의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는 사실로부터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히브리인들에게 '정적인' 사고는 이질적인 것이었으며 오직 '동적'인 범주 안에서만 사고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적인 증거로 사용하게 되었다(아래 참고문헌에 있는 Boman의 저서를 참조하라).

 

히브리어에서 명사적 문장 이외에, 존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불변화사 예쉬(vyE , 3426, 긍정문)와 아인(@yIa' , 369, 부정문)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실제로 다른 형태의 명사적 문장이다. "perheps 'there are' fifty righteous in the city"(그 성 중에 의인 50'있을지라도'), "'there is' no God"(하나님이 '없다'하도다). 예쉬(hb;yae , 342)와 아인(@yIa' , 369*)은 성격상 동사이기 보다는 오히려 명사에 해당하며, 기능상으로 불어의 il y a와 독일어의 es gibt와 유사하다.

 

그러나 하야(hy:h; , 1961)가 서술적 형용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a)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상황을 묘사할 때, "The earth was(하예타) formless and void", 땅이 형태가 없고 비었으며(한글개역,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1:2),

(b) 역사적인 기사에서, 'The serpent was(하야) more subtil than and beast of the field", 어떤 들짐승보다도 뱀이 더 간교하였다(한글개역,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3:1),

(c) 격언적인 진리를 표현할 때, "It is not good that man should be(헤요트) alone","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2:18). 하야(hy:h; , 1961)를 지닌 동사적 문장과 하야(hy:h; , 1961)를 지니지 않는 명사적 문장의 병행을 유의하라. "you shall be(티히우) holy for I (am) holy(카도쉬 아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할찌니라(19:2). 보만은 이 구절의 후반부에 연계사가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술어(거룩하다)가 주어(하나님)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기 대문에 연계사가 필요없다고 한다. 그는 이에 덧붙여 처음에 나오는 'be'는 사실상 'become'(되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로부터 성경에서 'to be'(이다)의 기본 의미가 'to become'(되다)이라고결론 내리는 것은 부당한 비약인 것 같다.

 

특히 중요한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7:23, 11:4, 24:7, 31:33 )라는 언약 문구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와 같은 축복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hy:h; , 1961)의 용법이다. 그르치기 쉬운 여지는 있으나, 하야(hy:h; , 1961)는 위에서 지적한대로 '오다' to come로 종종 번역된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어느 개인에게 '임하는' coming 것과 관련하여(11:29, 삼상 19:20),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왔다' came고 하는 그런 곳에서(15:1, 삼상 15:10, 삼하 7:4, 36:1)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간략히 언급할 것은 예호바/ 야훼(Jehovah/ Yahweh)의 의미와 해석에 관한 것이다. 이 이름에 동사 하야(hy:h; , 1961, 이다 to be)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그러나 YHWH 항목을 참조하라). 문제는 그 동사가 칼형, '이다' to be, '그는 있다' He is인지 아니면 히필형, '그는 존재하게 한다' He causes to be인가 하는 것이다. 울브라이트는 (W.F.Albright)는 후자를 지지한다. 후자의 해석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이 견해가 3:14에 있는 핵심 본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that I am의 독법상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70인역본의 에고 에이미 호 온(ego eimi ho on)에 반역되어 있듯이 "나는 있는 자[]이다" I am he who is 혹은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 I am he who exists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의 1:8에서 확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아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하나님의 '있으심' is-ness은 그의 임재하심과 존재하심 모두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결코 없다고 할 수 있다.

V.P.Hamilton. (p.426*).

 

 

[동의어] (관련성구)

&l'h;(1980, 할라크)

가다, 오다, 걷다

 

할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오다, 걷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오며, 다양한 문맥에서 그 문맥에 따라 '가다, 오다, 걷다, 떠나다, 나아가다, 계속하다, 지나가다, 행하다, 생활하다, 여행하다, (물이) 흐르다, 추방하다, 파괴시키다, 돌아다니다, 함께 가다, 교제하다' 등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할라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37:13, 37:20, 19:32, 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8:3, 8:5),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27:14, 50:18, 왕하 3:7, 2:3)에 주목해야 한다.

 

(b)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 다님' creeping(3:14), 여우의 '노님' prowling(5:18), 배의 '항해' sailing(7:18), 물의 '흐름' flowing(2:14), 나팔 소리의 '커져 감' laying(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2:11), 이슬(6:4), 바람(78:39), 슬픔(16:6), 인간의 생명(15:2, 23:14) 등의 ''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가상적인 신(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할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18:33). 아마도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콜(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going)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할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 33:14,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할라크로 표현됨; 참조: 3:6, 10:32-36).

 

(d) 배교는 그들이 다른 신이나 거짓 신을 '좇는다'(32:1, 5:23)거나, 자기 자신의 악한 꾀(7:24, 1:1)나 악한 마음(11:8)을 추구하거나 어둠 속에 행하는 것으로(9:2 [H1])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26:24).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왕상 3:14, 119:1 이하). 이 개념은 할라크 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체다코트, 33:15 등과 같이 단어 아하레와 함께 쓸 필요가 없다).

히트파엘형은 이와 관련하여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좋은 예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있다(5:22, 6:9, 17:1).

(참조: L. J. Coppes; BDB).

 

 

[동의어] (관련성구)

dr'y:(3381, 야라드)

내려오다, 내려가다, 내리다

 

야라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내려오다, 내려가다, 내리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80회나오며, , 히필,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팔레스틴의 고원지대는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그리고 동쪽으로는 해면보다 훨씬 낮은 깊은 열곡, 아라바하(Arabah)에 면해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어느 곳을 여행하든지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게 된다. 예루살렘이 지리상의 중심지이므로, 여행자는 "올라가거나"(알라) "내려간다".

몇 구절들에서 야라드는 목적지가 실제적으로 언덕 위에 있을 때 사용된다. 게다가 이 단어는 남쪽 방향이나 아래 지역, 혹은 그밖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15:3).

또한 중요한 곳에서 보다 덜 중요한 곳, 즉 성전이나 궁궐에서 개인의 집으로 옮기는 것의 느낌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삼하 11:9이하).

더구나 내려온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명성의 신분을 떠나는 것,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47:1, 48:18).

이 단어는 종종 전쟁시에 적과 교전하기 위해 행하는 '군사 기동 연습'을 의미한다.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군인, 도시, 성벽들은 모두 무너지고 만다(2:22, 20:20, 28:52). 그리고 넘어뜨린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식으로 패하게 된다(51:40, 7:12).

다른 용례들은 '어떤 것을 분리하는 것, 짐승이나 전차, 옥좌나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 물건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 비나 눈물이 내리는 것' 그리고 '선원들이 바다로 내려가는 것'(42:10)을 포함한다.

 

'애굽으로 내려가다'는 언약을 맺지 않은 백성들 사이에서 거주하기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야곱의 아들들이 맨처음 애굽에 정착하러 가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는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46:2 이하). 그 후 그들이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획득한 후에, "애굽으로 내려가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버리고 실패할 인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30:2, 31:1).

 

스올은 땅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죽는 사람은 누구든지 스올로 내려간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줄을 너희가 알리라"(16:30).

스올의 욕구는 커서, 내려간모든 사람들을 다 삼킬 것이다: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5:14).

잠언은 간음한 여자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녀의 집이 "음부의 길이며,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7:27).

 

신현현은 하나님이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기의 거처를 떠나 직접적으로 말로써 혹은 간접적으로 어떤 도구를 매개로 하여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 오신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불로 내려오셨다(19:18, 대하 7:1 이하).

그리고 장막에서 그는 구름 기둥에서 나타나셨다(40:34이하, 12:5).

모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하나님은 장로들 사이에 내려오셔서 그의 신중 어떤 것을 모세에게서 취하여 장로들에게 나눠주셨다(11:17).

더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신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하기 위해 나타나셨다(3:8).

다른 한편, 또한 하나님은 심판하러 내려오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악함의 실상을 조사하신다(: 바벨탑에서 11:5,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18:20이하). 죄악이 관영하였음을 확인하고서 강림하사 높은 곳을 짓밟으신다(1:3). 즉 그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를 파괴하심으로써 심판을 시작하신다.

게다가 그는 패역한 국가들을 쳐부수기 시작하신다: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1:4).

(참조: J. E. HARTLEY; BDB).

 

 

[동의어] (관련성구)

fl'm;(4422, 말라트)

피하다, 도망하다, 구출(구원)하다

 

말라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만히 가버리다, 피하다, 도망하다, 구출(구원)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5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말라트는 '피하거나 도망하다'는 의미로 자주 나온다(19:17, 19:19-21, 3:26, 삼상 22:1).

 

말라트는 자신의 친지들을 만나기 위하여 궁중의 환대를 피하는 것(삼상 20:29), 혹은 고난에 처한 빈민을 구제하는 것(29:12)을 나타낸다.

그러나 말라트 의미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국면은 개인적인 적의 손에 의한(삼상 19:11, 삼상 23:13), 혹은 민족적인 적의 손에 의한(삼하 19:10), 혹은 질병에 의한(107:20) 죽음의 위험에서의 구원이나 혹은 모면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인 강조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역할이다(116:4, 107:20, 22:5). 하나님의 구원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며(28:26, 22:30), 죄에 대한 심판은 피할 수가 없다(왕상 19:17, 2:14-15). 구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 대해서만 가능하다(2:32, H3:5). 그분은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대조되는 것으로, 구원은 말의 능력(33:17), 민족의 강대함(21:6), 부유함(20:20), 혹은 자신의 총명함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vg'n:(5066, 나가쉬)

가까이 끌어당기다, 접근하다

 

나가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까이 끌어 당기다 draw near, 접근하다 approach'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대상에게 매우 가까이 근접하여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어근과 매우 비슷한 말인 카라브(br'q; , 7126)와 달리, 나가쉬는 실제적인 접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5회 나오며, , 니팔, 호팔,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나가쉬의 단순 용법은 근접, 즉 만지거나(27:21, 29:10), 먹거나(27:25), 입맞추거나(27:27), 포옹할(48:10)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움을 나타낸다. 군사적 문맥에서 사용될 경우에(참조: 카브) 이 단어는 종종 '싸우다'(to do battle)라는 말을 동반한다. 20:23 "나아가서...싸우리이까", 대상 19:14 "싸우려고...나아가니".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3:9, H4:9에서는 나가쉬 자체가 전쟁할 채비를 하는 것을 나타낸다: "너희는 열국에 이렇게 광포할찌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무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찌어다".

삼상 17:16, 삼상 17:4에서 '가까이 나아가다'를 나타낸다.

 

나가쉬는 또한 실제적 교전과 전쟁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9:6에서 이마에 타우(?)표를 가진 택한 자는 살해하지("가까이")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9:10에서 죽음()이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교만하게 떠버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주권적 언약자인 하나님께서는 칼을 인도하고 다스리어 심지어 전쟁 중에서도 택한 자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며(91:7) 그리고 악인을 벌하신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나사쉬는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로 그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 다가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43:19, 45:4, 왕하 5:13).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자기 백성 중에서 나온 왕은 종말에 당신에게로 그렇게 접근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30:21).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그에게 가까이 나아간다(42:1, 참조: 에봇을 사용함, 삼상 23:9, 제비를 뽑음, 삼상 14:38). 이 어근은 하나님을 왕과 재판관으로 나타낸다.

때때로 하나님의 종에게 다가가는 것과 하나님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 사이에 판별하기가 어렵다(참조: 14:6, 21:1). 그러나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 즉 소송을 다루기 위해 마련된 법정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입증된다(18:23).

하나님께서는 와서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인간들을 부르신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3:9).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문책하기 위해 법정에대한 이런 비유적 표현을 설득력 있게 사용한다(41:1, 41:21, 45:20-21). 하나님의 종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그의 옹호자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과오)가 입증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50:8).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자기 백성 위에 앉으시며(3:9), 자신을 대표하여 재판권을 행사할 인간을 임명한다(24:14, 25:1).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와 논쟁할 때 백성들을 증인으로 소환한다(왕상 18:30).

 

인간들은 또한 크시고 거룩하신 구주로서 크신 왕이시자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제의적으로 사용된다. 본래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결해야 하며(19:22, 20:21, 28:43, 30:20, 21:21) 지정된 대로 따라야 한다(: 4:19). 이 단어는 카라브(br'q; , 7126)와 상호 교체되어 나온다. 카라브(br'q; , 7126)는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것(8:14)과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2:8) 모두를 나타낸다.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12:2, 카라브) 29:13에서도 그렇다.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나 마음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신다고 선언한다.

말라기는 이 단어를 6, 언제나 '제물을 드리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1:7-8).

나카쉬는 19:15에서 성적 관계에 대해 사용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참조: L. J. COPPES).

 

 

[동의어] (관련성구)

hl;[;(5927, 알라)

올라가다, 오르다

 

알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올라가다, 오르다, 올라오다'를 의미하며, 여기서 '떠나다, 멀리가다, 끌려가다, 높여지다, ~에 달하거나 미치다, 가져오다, 취하여 가다, 바치다, 높이다'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00회 나온다.

(참조: BDB).

 

 

[동의어] (관련성구)

hn:P;(6437, 파나)

돌리다, 돌이키다, 향하게 하다, 쫓아버리다

 

파나(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돌리다, 돌다, 방향을 바꾸다, 향하게 하다, 쫓아버리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100회 나오며, 칼형으로 가장 많이 나타난다.

 

파나의 기본 의미는 "돌다" to turn이지만 여기에서 이 단어는 수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컨대 파나가 어떤 방향을 "향하여 돌다"(2:3), 또는 어떤 사람이나(50:16) 사물(16:10)을 향해 돈다는 뜻도 있다. 나아가서 다음의 의미도 지닌다: "뒤로 돌다"(8:20), "로부터 돌이키다"(18:22), "주위를 돌아보다"(2:12), "기다리다, 기대하다"(1:9), "주의를 집중하다, 숙고하다"(6:28), "쫓아내다"(3:15) 등이다.

 

 

[동의어] (관련성구)

br'q;(7126, 카라브)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 들어가다, 가까이 당기다

 

카라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까이 오다 come near, 접근하다 approach, 들어가다 enter into, 가까이 끌어당기다 draw near'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객체(또는 주체)가 매우 가깝고 친밀하게 근접해 있거나 접근해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적 의미로는 객체와의 실제적 접촉 개념이 있다(37:7, 37:17의 피엘 명령형; GKC, 52n, 64h; 또한 아마 14:20, 19:13 ).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80회 나오며, ,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카라브는 일반적으로 서로간의 친밀성의 개념도 없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를 의미한다. 12:11에서 이 단어는 공간적 근접성, 즉 공간적으로 어떤 것에 가까이 밀착된 상태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즉 이 동사는 주제가 객체, 곧 문제의 대상이나 사람을 볼 수 있고(32:29), 객체와 말할 수 있고(9:6) 혹은 객체를 만질 수도 있을 정도로(10:4, 36:2) 주체가 그 객체에 충분히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b) 카라브는 어떤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적인 근접성을 묘사한다. '카라브'는 종교적인 축제와 같은 즐거운 행사가 임박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15:9). 이 단어는 불길한 사건이 임박함에 대해 사용되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27:4).

 

(c) 카라브는 다양한 전문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용례에는 인격적 관계라는 개념이 있다. 즉 단순히 어떤 것(어떤 사람)에 근접해 있음이 아니라, 그것이나 그 사람에게 능동적이고도 인격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투를 묘사하는 문맥에서는 '무장투쟁'을 나타낸다. 2:37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의 땅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명하셨다. 그러나 2:19에서는 그 땅에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난해하게 보이는 이 내용은, 2:37이 전문적으로 싸우러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2:19은 일반적 접근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때 선명해진다. 이 군사적 의미는 25:118:5에서도 분명하다.

어떤 구절에서는 이같은 군사적 의미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부주의한 독자들은 이를 간과하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미는 존재한다.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27:2). 27:3의 용례("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는 이 동사의 의미가 '접전하다'임을 입증해 준다. 91:10, 119:150도 보라.

 

(d) 카라브는 또한 전문적 용법으로 '성적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 관한 자기의 순결을 확언하는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20:4).

또한 22:14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가까이 나아가'("동침할 때에") 처녀성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였고, 8:3에서는 선지자가 자기 아내에게 '가까이 나아가'("동침하매") 그녀가 잉태했다고 기록되었다.

 

(e) 카라브의 전문적 용법에는 제의적인 용법이 있다. 이 경우 사람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림에 있어서 수행하는 각각의 모든 단계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모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다(3:5). 후에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그의 거룩한 산에 접근하면서 그와 동일하게 주의하였다(4:11, 5:23). 그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가까이 모여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만나(가까이 나아가)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요청하여 그 일을 위탁하였다(5:27).

그 후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와 만났다. 그들은 성막을 지을 재료를 가져와 하나님 앞에 헌물(고르반)로 드렸다.

레위인들은 성막의 관리인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가까이 나아가는) 헌물로 드려졌다(16:9, 18:4, 참조: 3:4).

한편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거룩한 희생제사의 유일한 제사장들로 바쳐졌다(참조: 10:3, 18:3, 18:22). 이러한 직무적 의미의 가까이 나아감에는 하나님에 의한 특별한 선택과 이스라엘에 의해 바쳐진다는 개념이 수반된다(29:4).

제사장들은 분부에 따라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 입으며 자신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순결(자신들을 범인들과 구별함)을 유지시켜야 했다(9:4, 9:8, 9:10).

흥미롭게도 히필 어간은 백성들에 의해(1:14), 제사장들을 통하여(1:5)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뜻으로 가장 빈도 높게 사용되었다(1:13). 이와 같이 제사장들에게 바쳐지는 것은 무엇이나 다 거룩하며 희생제사에서 불타지 않은(또는 파괴되지 않은) 모든 부분은 제의와 공적으로 관련된 자들에게 속한다(3:7).

이러한 공적 의미가 가장 의의 깊게 적용되는 곳은 30:21이다. 여기에서는 장차 하나님의 왕(왕족?)이 제단에서 직무를 수행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보통 배교적 행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주정치에서 어떤 왕도 이를 행하지 않았다, 참조: 왕하 16:12)!

어려운 소송에서는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 앞에 나아왔다(성막에서,9:5, 삼상 10:20이하).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비교해 보라. 제비 뽑기에 의한 재판으로 아간을 찾아낸 경우(7:14), 전쟁 수행 여부에 관한 결정(삼상 14:36),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한 백성들의 종말론적(그리고 영적) 회합(41:1, 48:16, 기타 등등).

이러한 제의적 의미가 카라브의 기타 용례들과도 관련된다. 예를 들면 3:57에서 탄원자가 부를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 즉 흔쾌히 도와준다고 언급한 경우이다(참조: 4:7, 34:18).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이 신실한 자들의 편으로 묘사된다(13:4, 45:10). 예를 들면 그의 이름(75:1, 119:151), 그의 구원(85:9), 그의 의(51:5) 등이다. 여기의 개념은 수동적(즉 가까움)이 아니라 능동적이다(즉 돕는 자, 자기편). 또한 인식론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가깝다(30:14).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서는 가까우나 마음으로부터는 멀다고 말한 내용도 아마 이러한 의미(그리고 제의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을 것이다(12:2). 그리고 솔로몬의 경우도 아마 자기의 말을 계속적인 희생 제사로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 것이다(왕상 8:59).

(참조: NEDOT; L. J. COPPES).

 

 

[동의어] (관련성구)

$Wr(7323, 루츠)

뛰다, 달리다 run

 

루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뛰다, 달리다 ru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00회 이상 나온다.

 

루츠는 모세 오경에서 사람이, 즉 대개는남자가(18:27, 24:17), 가끔은 여자가(24:20) 달리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며, 2:4에서비로소 말이 달리는 것을 묘사한다.

이 어근에 의해 묘사되는 달리기의 유형과 방식은 다양하다. 낮선 사람을 맞이하여 환영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경우(18:2-7), 흥분하여 달리는 것(24:28), 두려워서 달리는 것(7:21),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리는 것(삼하 18:22), 공식적·제의적 성격의 달림(왕상 1:5) 등이 있다. 대부분의 용례들에서 달리는 행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는 어디를 향하여 달리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전치사가 사용되었다.

루츠의 몇몇 특별한 의미도 발견된다. 그 중 하나로서 루츠의 히필 어간은 '빨리 달리다(가져오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41:14). 41:14에서이 단어를 KJV"그를 급히 데려왔다" brought him hastily라고 번역하며, RSVJPS도 그렇게 번역한다(한글개역, "급히 그를... 낸지라"). 또 다른 특별한 용법이 구약성경에 한 번 나온다. 2:5에 사용된 루츠의 필펠형은 번개처럼 '이러저리로 달리는' run back and forth 병거를 묘사한다.(W. White).

 

[참고 - 어근 루츠($Wr , 7323)'달리다' to run, 빨리 달리다 make haste by running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이다. 비록 이 어근과 아카드어 라추(ra?u)는 언어학상으로 동적어이긴 하지만 이 두 용어들은 별개의 어의적 발달을 겪었다. 아카드어 라추(ra?u)'돕다' 를 의미하지만 이 히브리어 어근은 단지 근소하게 그런 의미를 띨 뿐이다. 루츠($Wr , 7323)는 창세기와사무엘상하에서 매우 많이 발견된다. 이 어근은 선지서와 후기의 역사서에서는 보다 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오경 전체에 걸쳐서 이 단어는 사람이, 즉 대개는 남자가(18:27, 24:17), 가끔은 여자가(24:20) 달리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아카드어 동족어 라추(rasu)는 동물이나 무생물체가 달리는 것을 기술하는 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히브리어 어근 루츠($Wr , 7323)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말이 언급되어 있긴 하지만 어근 루츠($Wr , 7323)2:4에서야 비로소 말이 달리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어근에 의해 묘사되는 달리기의 유형과 방식은 다양하다. 낮선 사람을 맞이하여 환영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경우(18:2, 7), 흥분하여 달리는 것(24:28), 두려워서 달리는 것(7:21),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리는 것(삼하 18:22), 공식적, 제의적 성격의 달림(왕상 1:5) 등이 있다. 대부분의 용례들에서 달리는 행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는 어디를 향하여 달리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전치사가 사용된다. 다음과 같은 전치사들은 달리는 행동의 정확한 방향을 알려준다. '...에 대하여' against, 히브리어 ''(16:14); '...로부터 떨어져서' away from, 히브리어 ''(삼상 4:12); '...의 앞에' before, 히브리어 '리프네'(삼상 8:11); '...의 뒤에' behind, 히브리어 '아하레'(왕상 19:20), '멀리' far, 히브리어 접두사 '-'(1:9); '...' to, 히브리어 접두사 '-'(24:20, 17:12); '...을 향하여' towards, 히브리어 '리크라트'(18:2); '위로' upon, 히브리어 접두사 '아드-'(왕하 4:22). 이 어근의 몇몇 특별한 의미도 발견된다. 그 중 하나로서 루츠($Wr , 7323)의 히필 어간은 '빨리 달리다(가져오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41:14). 41:14에서 이 단어를 KJV'그를 급히 데려왔다' brought him hastily라고 번역하며, RSVJPS도 그렇게 번역한다(한글개역, "급히 그를 ...낸지라"). 또 다른 특별한 용법이 구약성경에 한번 나온다. 2:5에 사용된 루츠($Wr , 7323)의 필펠(pilpel) 어간은 번개처럼 '이리 저리로 달리는' run back and forth 병거를 묘사한다. - W. White.] (p. 1328*).

 

 

[동의어] (관련성구)

hb;v;(7617, 샤바)

포로로 잡다 take captive

 

샤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포로로 잡다 take capti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 사용되었다.

 

샤바는 주로 군사적 또는 준군사적 세력이 적을 정복하고난 후 정복당한 측의 남자, 여자, 아이, 가축, 재산을 사로잡아 자기들의 소유물로 삼는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포로 수용 시설이 있었다는 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보통 전쟁이 끝난 후 생존한 성인 남자들은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예컨대 삼상 30:2은 아말렉이 시글락을 쳐 부순 후 "여인들을 사로잡았다"고 말하며 그 뒷 구절들은 이 포로들 중에 아이들도 들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대상 5:21에서 가축 때가 사로잡힌 실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대하 21:17에서는 여호람 왕의 재물이 그의 아내들 및 자녀들과 함께 탈취당하였다고 말한다.

 

샤바의 한 흥미로운 용법이 68:18, H19에서 등장하는 '당신께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셨나이다' Thou hast led captivity captive(한글개역: "주께서...사로잡은 자를 끌고")라는 표현과 5:12'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을지어다' Arise, Barak, and lead thy captivity captive(한글개역: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라는 표현 속에서 발견된다. 이 표현은'샤바 셰비'로서, 68편의 여호와와 삿 5장의 바락이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68:18, 여호와께서 승리하시고 법궤와 함께 시온산과 예루살렘으로 영광스럽게 오르시는 모습 및, 상징적으로 그가 모든 대적들을 사로잡아 가고 있는 모습을 명백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8에서 바울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승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도 역시 이제는 사로잡힌 수많은 대적들에 대해 승리하시고 올라가시는 것으로 보고 있다(한글개역: "그가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4:8).

61:1,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거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러 올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이 군사 용어는 죄와 사탄으로부터 인간의 영적 해방을 묘사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4:18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자신의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있던 자들의 분노를 샀다.

따라서 68:18은 바울에 의해 4:8에서, 메시야가 그의 적들을 사로잡은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해석되었으며, 61:1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메시야가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해석되었다.

(참조: G. G. Cohen; BDB).

 

 

[동의어] (관련성구)

bWv(7725, 슈브)

() 돌아가(), 회복하다

 

슈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돌아 가(),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오며, , 폴렐, 푸알, 히필, 호팔, 풀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형과 히필형에 국한한다.

성경에는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해 주는 관용구들이 풍부하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0:12) 등등. 그러나 인간의 회개 행위에 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이 한 동사 슈브에 포괄되며 슈브로 요약된다. 이 동사는 본질적으로 회개의 두 가지 필수 조건들을 다른 어느 동사보다도 더 잘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필수 조건이란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 어간에서 슈브는 10가지 상이한 의미를 지니며 이 의미들도 각각 다시 나뉘고 그 중 몇몇 용례는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Hollacay). 이 중 두 세 가지는 특별히 고찰해 볼만하다.

우선 첫째로,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슈브의 기본 의미 '()돌아오다'270회 이상 출현한다.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가 몇 번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사라)로 돌아오리라"(18:14). 인간이 주체인 경우가 가장 많다: "내가(아브라함) 아이(이삭)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22:5). 히필 어간에서는 '되돌리다, 다시 가져가()'라는 의미로 87회 등장한다.

둘째로, 종종(120회 이상) 슈브는 일종의 조동사 구실을 하여 둘째 동사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삭이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26:18).

셋째로 슈브의 칼형이 지니는 중요한 용법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회개의 의미에서), 또는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죄를 버리고 부인한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배교한다는 의미)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에서 출현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슈브의 칼형이 129회 사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대 인간의 관계를 논할 때 슈브의 히필형은 11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칼명령형) 우상을 '떠나고'(히필)"(14:6).

모든 어간을 고찰하고 난 후 홀러데이(Holladay)는 언약의 문맥에 슈브의 용례가 총 164회 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다수 곧 113회가 고전적/문학적 선지서들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가 그 선두를 달린다(48).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으로 이사야의 첫 39장에는 슈브의 언약적 용법이 단지 6회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30:15"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지 않고 '여전히 앉아 yashab 즉 외국과의 동맹을 끊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는다면 5회 밖에 되지 않음). 나머지 뒷 부분의 27장에서는 단 4회가 발견된다: 44:22, 55:7, 57:17, 59:20. 이처럼 우리는 이 두 예언서가 정경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다. 즉 첫째 것은 이 주제에 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으며, 둘째 책은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용례 결핍 현상은 아마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식의, 이 선지자의 어투 때문일 것이다. 매우 통렬하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염려컨대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슈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10).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자기의 계획 속에 혼입시켰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13:13 이하).

수많은 구절에서 슈브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다" to return from exil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칼형: 물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나오며(2:1, 7:6), 그리고 특히 10:22, 22:10, 10:9.

히필형: 특히 왕상 8:34, 12:15.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개념과 언약에로의 복귀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어느 형태의 죄이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 만큼의 갱생이었다. 하나님의 그 어느 쪽의 돌아옴이든 허락한다는 것은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구약성경에는 회개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없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잘 예증된다(51). 그러나 백성들에게 '~에로' 또는 '~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요구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죄가 근절할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돌아섬으로써 즉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능력에 의해 죄인이 자기 운명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회개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임의로운 주권적 행동과, 인간이 통회와 슬픔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 결단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죄의 거부와 자기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긍정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V. P. Hamilton; B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