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b
hl;G:(1540, 갈라)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옮기다, 유형(포로)의 몸이 되다
갈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uncover, 옮기다, 이동하다, 제거하다 remove, 유형(포로, 추방)의 몸이 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80회 이상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푸알, 히필, 호프알,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a) 갈라는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라는 의미에 따라 사용되었다.
칼형에서 이 동사는 자주 감각 기관, 즉 귀(삼상 9:15 등)와 눈(민 24:4)을 목적어로 하여 사용된다.
'귀를 열다' uncover the ear라는 관용어구는 단순히 '보이다' show, '드러내다' reveal를 의미하며 사람이나 하나님을 그 주어로 취한다. 사람을 그 주어로 취할 때, 이 단어는 요나단에 대한 사울(삼상 20:2), 다윗에 대한 요나단(삼상 20:12-13), 사울에 대한 측근들(삼상 22:8), 사울에 대한 제사장들(삼상 22:17), 친족에 대한 보아스(룻 4:4)와 관련하여 나온다. 하나님을 주어로 취할 경우는 다음과 같다: 사무엘에게(삼상 9:15), 다윗에게(삼하 7:27 = 대상 17:25), 일반 사람들에게(엘리후의 연설에서 - 욥 33:16, 욥 36:10). 이 단어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으므로, 이 단어를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는 전문 용어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며(참조: 사 22:14), 때로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자기의 계시를 전달하셨다. 그는 일반 사람들에게 꿈이나 환상(욥 33:16), 견디기 어려운 체험(욥 36:10)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행하신 계시에 관한 이 전형적인 언명에서, 갈라를 목적어 소드(비밀 secret)와 함께 사용하였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이 동사는 또한 잠 20:19에서도 소드를 목적어로 취한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자기를 계시하였을 때, 발람의 눈이 "드러났다", 즉 '열려졌다'고 한다(민 24:4, 민 24:6). 이런 식으로 발람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볼 수 없었을 어떤 것을 보았던 것 같다.
이런 개인적인 폭로 외에, 갈라의 칼형은 널리 알려진 소식에 대해 사용된다. 하만과 모르드개가 음모를 꾸미고 논쟁하던 중에, 하만이 기록한 것(에 3:14)과 모르드개가 기록한 것(에 8:13)을 선포하는 왕의 조서가 그 지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되었다. 칼의 수동 분사형은 렘 32:11, 렘 32:14에서 봉인된 것과 반대되는 '개봉된' 문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니팔형에서 이 행동은 수동적, 혹은 재귀적인 방식으로 주체 그 자체에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수동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드러나다' be uncovered를 의미한다: 즉 맨살(개역 한글판에는 출 20:27에서는 '하체', 사 47:3에서는 '살'), 치마(렘 13:22), 그리고 기초(삼하 22:16 = 시 18:16, 여기에서 이 단어는 라아의 니팔형 '보이다' be visible와 병행되어 나옴)가 드러나다. 따라서 이 단어는 '알려지다' be known(사 23:1)와 '계시되다' be revealed를 의미한다 -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단 10:1).
재귀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자신을 드러내다' expose oneself(삼하 6:20에 다윗에 대해 3회) 혹은 블레셋인들에게 나타난 요나단(삼상 14:8), 욥에게 나타난 사망의 문(욥 38:17)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자기 자신을 보이다 혹은 드러내다' show/ reveal oneself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에 대해서 사용되었다(창 35:7, 참조: 창 38장). 이 단어는 또한 사무엘의 유년기 기사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즉 엘리의 조상들(삼상 2:27)에게, 사무엘(삼상 3:21, 참조: 삼상 3:7)에게 나타내신 그의 계시에 대해 사용되었다. 관용구 "귀를 열다"와 아모스의 전형적인 언명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이 단어는 한 선지자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한다.
수동적인 의미를 지닌 니팔 분사형은 신 29:28에서, 이 책에서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공공연한 위협과 약속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40:5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광 -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은, 땅에 대한 그의 승리 - 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 56:1에서도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사 53:1에서, 고난 받는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인류에게 계시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동사 갈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는 전문 용어가 아니지만, 자주 이런 의미를 전달한다.
마찬가지로 피엘형에서도 이 단어는 항상, 그 외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어떤 것을 '드러내다' uncover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눈을 '열다' open - 천사(민 22:31)나 율법의 기이한 것들을 보다(시 119:18), 여호와께 불평하는 예레미야에 대해(렘 11:20, 렘 20:12),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진리를 나타내시며(렘 33:6) 그들에게 그의 의를 보여주신(시 98:2) 여호와에 대해 '알게 하다' make known, '드러나게 하다' make revealed, '명백히 하다' manifest; 탈주자들에 대해(사 16:3), 비밀에 대해(잠 11:13, 잠 25:9), '폭로하다' betray; 에서의 비밀한 곳(렘 49:10), 어둠의 비밀(욥 12:22), 지대(미 1:6), 죄(욥 20:27, 애 2:14, 애 4:22), 그리고 발(룻 3:4, 룻 3:7); 흑암의 신비(욥 12:22)에 대해 '폭로하다' uncover, '드러내다' expose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어간에서 이 단어는 금지된 성적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과 20장에서 금지된 상황에서의 성교, 일반적으로 근친상간을 의미하는 '수치를 드러내다' uncover the shame라는 표현으로 24회 나온다(신 22:30, 신 27:20). 이 단어는 또한 덮여있는 것을 벗겨내거나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즉 여자의 치마(사 47:3, 나 3:5), 유다를 보호해주는 덮개(사 22:8), 그리고 해수의 외피(욥 41:13)에 대해 사용되었다. 게다가 많은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부끄럽다' shame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 20장 외에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었다"고 불평하는 선지자의 불평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대한 충성을 던져버렸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은유이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 혹은 그녀의 전에 사랑하던 자가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다 - 믿음 없는 민족을 "수치스럽게" 할 것이다(호 2:10, 겔 16:36), 니느웨에 대한 위협(나 3:5)과 바벨론에 대한 위협(사 47:3)을 참조하라.
(b) 갈라는 '옮기다, 이동하다, 제거하다, 유형(포로, 추방)의 몸이 되다'라는 의미를 따라 사용되었다.
자동사 갈라의 기본적인 의미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겔 12:3과 해산하는 비느하스의 아내의 애곡,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에 나온다. 이와 비슷한 의미가 이사야의 애곡,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으며"(사 24:11)와 악한 자의 운명에 대해 소발이 말한 묘사, "그 가산의 증가가 떠날 것이며"(한글개역 - "그 가산이 패하여", 욥 20:28)에서 발견된다. 이 단어는 또한 잠 27:25과 호 10:5에서 '떠나다' depart라는 단순한 의미를 지닌다.
나머지 20개의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칼형으로, '사로잡혀 가다'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외에 이 단어는 '포로(추방)의 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필형으로39회 나오며, 칼형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수동 호팔형으로 7회 나온다. 이 동사는 아모스(암 1:5, 암 5:5, 암 5:27, 암 6:7, 암 7:11, 암 7:17)와 예레미야(렘 13:19, 렘 20:4, 렘 22:12, 렘 27:20, 참조: 애 1:3, 사 5:13)에 의한심판의 예고에서 주로 두드러진다.
여러 구절들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포로의 신세로 이끄는 주체로 지칭된다(렘 29:4, 렘 29:7, 렘 29:14, 겔 39:28, 암 5:27, 애 4:22, 대상 5:41 - 대행 하는 사람[느부갓네살]이 명백하게 언급되는 유일한 곳, 참조: 왕하 17:11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유다)이나 이들의 영광이 이 동사의주체이다.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끌어내어 포로 신세로 만든 여호와의 심판은 그들의 역사 초기에 선물로서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조상들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거듭 되풀이하신 약속은 선지자들을 통해서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겠다고 거듭 되풀이하신 약속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왕하 17:11에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쫓아내신 가나안 인들의운명과 명백히 유사하다.
이 동사가 결코 신명기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이 땅에서부터 쫓아낸다는 위협은 "(그)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다"(신 4:26, 신 11:17), 그리고 푸츠(히필형 '흩어버리다' scatter)와 같은 다른 표현들로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만약 신명기에 포함되어 있는 모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연설이 실제로는 후기의 것이라면, 주전 9세기에 땅으로부터의 추방을 뜻하던 일반적인 용어 갈라가 주전 7세기의 선지자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인 것 같다.
(참조: B. K. Waltke).
[동의어] (관련성구)
dz:a}(230, 아자드)
가버리다, 떠나다
아자드(아람어, 동)는 '가버리다, 떠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페알형으로 2회 사용되었다(단 2:5, 단 2:8).
(참조: Gesenius).
[동의어] (관련성구)
lz'a}(236, 아잘)
가다, 떠나다, 여행하다
아잘(아람어, 동)은 '가다, 떠나다, 여행하다'를 의미한다(스 4:23, 스 5:8, 스 5:15, 단 2:17, 단 2:24, 단 6:18, 단 6:19).
(참조: TWOT).
[동의어] (관련성구)
!T;[]G"(1609, 가탐)
가담 Gatam
가탐/가담의 의미는 '그들의 만짐'과 '불에 탄 골짜기'라는 의미가 제시되었다. 그는 에서의 손자(창 36:11, 16, 대상 1:36)이며, 에돔 족장인 엘리바스의 넷째 아들이다.
[동의어] (관련성구)
ax;y:(3318, 야차)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나가게 하다, 이끌어내게 하다
야차(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히필형에서 사역적 의미, '나가게 하다, 나타나게 하다, 이끌어내게 하다'를 의미한다.
야차(ax;y: , 3318)는 칼형과 히필형으로는 1,000회 이상 나오지만, 호팔형으로는 오직 5회 나올 뿐이다. 이 히필형은 일반적인 사역적 의미, '나가게 하다' cause to go out,'나타나게 하다' cause to bring out, '끌어내게 하다' cause to lead out라는 의미를 지닌다. ASV와 RSV는 비슷하게 번역한다.
야차의 기본적인 개념은 '나가다' go out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사람의 현재 있는 곳에서부터 나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자연, 즉 바위에서 나오는 물,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본 항목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용례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신학적 관심의 주요 초점이 되는 대 출애굽 사건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이 때에 사역적 기능을 지닌 히필형이 전적으로 사용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이다(예, 출 3:10이하, 출 14:11). 출 6:13, 26이하에서는 아론이 모세와 함께 언급되었다. 그러나 훨씬 큰 강조점은 여호와, 곧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는 이 위대한행동에 관여한 주 하나님에게 있다. 모세도 출 13:3에서 저 중대한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애굽에서 곧 종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강조점을 둔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출 12:50이하에 기록되었다. 모세는 이 큰 기적이 선포해준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출애굽 구출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강한 권능을 4회 되풀이 언급한다(참조, 출 13:3, 9, 14, 16). 장자의 봉헌과 유월절 절기는 일정한 기념으로서 행해질 것이다. 더구나 시내 언약에 대한 기록에서, 위대한 왕의 자비로운 행동을 밝히기 위해 역사적 서언으로 언급될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다 이 구원 행동에 관한 것이다. 즉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이 기록은 역사가 신학적으로 연관되었음을, 즉 이 "나가는 " 위대한 사건(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강한 은총에 의해, 그의 백성들이 죄의 쇠고랑에서 강하게 구출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 4:37에 그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참조, 엡 1:4).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이 구속을 기념하고 그에 맞게 살도록 요구받는다(참조, 신 6:12, 신 26:8, 삿 2:12, 삼상 12:8, 왕상 8:16, 렘 11:4, 단 9:15 그리고 시편들에 있는 많은 언급들, 특히 시 136:11, 또한 시 106:6-12).
두번째 용법은 출애굽 주제에서 생겨난 것이다. 전문적인 의미에서 야차는 히브리 노예, 아마도 계약서에 약정된 종의 해방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21:2은 종으로 섬길 최대 기간을 6년으로 정하고 있다.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캇수토(U. Cassuto)는, 이 율법이 히브리 노예의 특정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상 이스라엘인들에게"너희는 애굽에서 히브리인 노예였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말하자면 인종적인 태생을 상관하지 말고, 히브리 노예인 사람들을 사랑과 동정심을 갖고 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단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가 애굽의 속박에서 나온 것처럼 너희의 계약서에 약정된 종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십계명의 서언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많이 읽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같다.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다' revert를 의미하는 전문적인 용법도 이와 다소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레 25:8-55은희년 법령을 기록하고 있다. 가난하고 또 그것을 무를 수 있는 가까운 친척이 없기 때문에 팔았던 재산이나 집은 "[그것이] 희년에 미쳐 돌아올찌니 그가 곧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 25:28, 30, 31, 33). 이사야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라"는 복음적 메시지를 말했을 때(사 61:2-3), 그는 앞의 두 가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같다.
야차의 또다른 신학적 용법은 출애굽 주제를 확대시킨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돌이킬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어떤 수 없이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 후에 다시금 회복되었다고 본다. 이런 심판의 무고한 희생물이 된 에스겔은 포로생활로부터 출애굽과 같은 새로운 구속적 활동에 대한 새 출애굽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을 인용한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사 20:41, 참조, 사 20:34). 이 일의 진정한 성취는 선한 목자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간"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사 34:13). 따라서 여기에서는 소망에 대한 종말론적 어조가 도입되어 있다.
때로 야차는 근원이나 기원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사용되었는데, 그 근원이 불(레 9:24), 섭리적인 인도(창 24:50) 혹은 구원(사 51:5)의 경우처럼, 여호와 자신일 때 특히 그러하다. 이 단어는 욥 8:10, 잠 10:18, 느 6:19에서처럼, 화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신 8:3에서모세는 영적 생활의 기본적인 원리들 중의 하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모차)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함이니라"(마 4:4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참조하라). 에스겔과 다니엘 모두가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사야만이 효과적인 힘을 지니고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을 강조한다. 구원을 받으라는 보편적인 권유 뒤에서, 여호와는 맹세로 이 권유의 유효성을 보증해준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사 45:23).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구하고 그를 부르라는 복음적 권유의 문맥 뒤에서, 이사야는 그의 말씀이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을 주는 비의 유비를 사용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이 구절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요한 신학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시 33:6이 요 1:3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참조하라. 우리는 바울이 빌 2:10 이하에서 제시한 사 45:23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도 주목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사야가 나가서(참조, 요 16:28)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내가 그를 보낼 때 맡긴 일을 성공한"(참조, 요 17:4). "말씀"에 대해 언급할 때 그가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이상하다.
- P. R. Gilchrist. (p. 678*).
[동의어] (관련성구)
dD'mi(4059, 밋다드)
도피
밋다드(명남)는 나다드(dd'n: , 5074: 물러가다, 도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도피'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7:4에 한번 나온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참조: Gesenius).
[동의어] (관련성구)
dWn(5110, 누드)
이리저리 움직이다, 흔들다, 방황하다, 불쌍히 여기다, 슬퍼하다, 애도하다
누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이리저리 움직이다 move to and fro, 흔들다 shake, 방황하다 wander, 불쌍히 여기다 have compassion, 슬퍼하다, 애도하다 lament, show grief'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회 나오며, 칼, 히필, 호팔, 히트포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누드는 기본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며, 육체적 움직임이나 태도에 사용된다.
이 단어의 두 가지 함축적 의미는 그 병행어와 동의어에 의해 입증된다.
첫째, 이 단어는 나함(!j'n: , 5162: 위로하다,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다, 후회하다, 사 51:19), 하말(lm'j; , 2550: ~에게 인정을 베풀다, ~을 불쌍히 여기다, 렘 15:5)와 병행된다.
둘째, '불안정하게 방랑하다, 불안정하게 움직이다, 조롱하여 머리를 흔들다'를 뜻하는 누아를 참조하라(창 4:12). 이 어근은 때로 나다드(무질서하게 퇴각하다)와 동일하거나 유사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 단어는 누스(도망하다)와 병행되고(렘 4:29) 하사(피난하다)와 대조된다(시 11:1). 잠 27:8을 참조하라. 이 동사는 27회 나타난다.
'목적 없이/집 없이 방황하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리신 저주에서 보여진다(창 4:12, 창 4:14). 그는 부모에게 내쫓겼을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사람(누아) 및 집 없는 방랑자(누드)가 되는저주를 받았다. 이 단어가 목적 없이 이리저리(방랑하며) 움직이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왕상 14:15에서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물에 의해 움직이는 갈대의 행동을 표현한다. 또 다른 실례는 사 24:20인데,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술 취한 사람의 불안정하게 흔들거리는 동작을 나타낸다. 잠 26:2에서 이 단어는 목적 없이 훨훨 날아다니는 동작을 의미하는 새의 '날아감'(flying)과 병행되어 있다(참조: KD, 렘 4:1).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은 또한 '아무개에게 동정을 느끼고 불행의 중대성을 인정하는 동정의 표시로서'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표상(表象)한다(KD: 시 69:20, H21). 이 어근이 나타날 때 이러한 행동이 항상 이해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 태도는 그런 식으로 상징화된다. 바벨론 유수는 유다에게 마땅하고도 의로운 심판을 가져온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아니할 것이다(사 51:19, 렘 15:5).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다른 민족들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그들을 동정해서는 안되며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렘 48:17, 나 3:7). 예레미야는 유다의 징벌의 정도가 너무도 크므로 그의 후계자들에게 임할 불행을 고려해 볼 때 죽은 요시야왕을 불쌍히 여겨(누드) 애곡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말한다(렘 22:10). 깊은 고통 속에 처해 있는 개개인들은 동정의 대상들이다(욥 2:11, 욥 42:11, 시 69:20, H21). 머리를 끄덕이는 행동은 놀라움을 함축할 수도 있다(렘 18:16), 심지어 보다 더 강력한 끄덕임은 경멸하는 거부를 암시하거나(렘 48:17, 시 64:8, H9, 참조: 시 22:8, H9), 깊은 애통을 암시한다(렘 31:18, H18, "탄식함").
이 동사는 종종 '~로부터의 패주'를 의미한다(참조: 누스, 나다드). 시 11:1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피난처라고 주장하고, 다른 피난처를 구하라고 충고하는 대적들을 꾸짖는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이 동사와 나다드를 서로 번갈아 사용한다(참조: 렘 49:30, 렘 49:5, 렘 50:3, 렘 50:8).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르시기를(레 26:17, 레 26:28, 참조: 신 28:7) 승리와 안전은 그의 임재하심에 달려있고, 그의 임재는 백성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고 하신다(참조: 누스). 이러한 사상은 왕하 21:8에 반영되어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전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행악자들이 그를(포로로) 쫓아내지 못하게 해주실 것을 기도드린다(KD: 시 36:11, H12).
(참조: L. J. COPPES; BDB).
[동의어] (관련성구)
['Wn(5128, 누아)
흔들리다, 떨다, 비틀거리다, 방황하다
누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흔들리다, 요동하다, 비틀거리다, 떨다, 방황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본래 개념은 앞뒤로 반복적인 운동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흔들림, 비틀거림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되는 비교적 소규모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와 같은 의미를 지닐 경우, 지리적인 규모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 비교적 소규모의 운동을 가리키는 실례로는 다음과 같다. 한나가 소리내지 않고 기도할 때 눈에 보일 정도의 입술의 움직임(삼상 1:13), 소경의 비틀거리는 걸음 혹은 방황하는 길(애 4:14), 바람에 나무가 흔들림(사 7:2). 이 용어는 또한 심판 아래 지구(땅)의 흔들림(사 24:20)과 건물의 흔들거림(사 6:4)에 적용된다.
지리적 규모의 움직임을 언급하는 실례는 다음과 같다. 집 없는 도망자나 부랑자와 같은 사람들의 방랑(애 4:15), 가뭄에 물을 찾아 헤메임(암 4:8),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여 헤메임(암 8:12). 이 단어는 또한 가인이 받은 형벌을 묘사한다(창 4:12, 창 4:14, 참조: 또한 누드). 가인이 받은 형벌에는 아마 누아의 전체 의미 중 일부가 포함되는데, 그것은 법률이나 일정한 사회 그룹(창 4:14)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집 없는 방랑자의 상태이다(14절).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 많은 반역은 방황(방랑)으로 묘사된다(렘 14:10).
요담의 비유에서 그 의미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나무를 지배하고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에 대하여 의도적인 언어 유희를 부린 것 같다(삿 9:9, 삿 9:11, 삿 9:13).
누아는 두려움의 표현으로 떠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분명한 실례는 시내산에서 유대인이 떠는 것이다(출 20:18, KJV의 '움직이며' removed라는 번역은 부정확한 것 같다). 적의 제휴에 대한 아하스의 반응도 그 예가 된다(사 7:2, ASV '전율했다' trembled; RSV '흔들렸다' shook, 한글개역 "흔들렸더라"). 그러나 이 언급은 전율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하스의 변덕스러운 마음의 '동요' wavering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니팔형은 수동으로, 체 안에서 흔들리는 것(암 9:9)과 무화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나 3:12)을 언급한다.
히필형은 위에서 논의한 개념들의 사역적 의미를 표현한다. 소규모 움직임의 사역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 시에 이스라엘을 '흔드실' 때 혹은'체질하실' 때 보여진다(암 9:9). 머리를 흔드는 것은 조롱의 표시다(왕하 19:21, 시 109:25).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이러한 조소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갈망한다(욥 16:4). 손을 흔드는 일도 역시 경멸의 표시다(습 2:15). 이 어근의 일반적인 용법에 비추어 볼 때, 단 10:10에서는 'set'(KJV, ASV)보다 '떨게하다'(RSV)가 더 적절한 것 같다(한글개역은 "떨더니").
'방랑하다'의 사역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리저리 방랑하게'(ASV, 한글개역은 "유리하게" 민 32:13) 하시는 것과 다윗이 잇대를 그와 함께 도망자로 방랑하게("유리하게") '하는' 것(삼하 15:20)을 표현한다. 이러한 용법으로 인하여 시 59:11, H12의 '흩뜨리다' scatter라는 번역을 '방랑자가 되게 흩뜨리다'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지지 받는다. 다른 한편 RSV '비틀거리게 하다'도 역시 좋은 번역이다.
위에서 논의된 사역적 개념들 중 어는 것을 보아서도 왕하 23:18에서 '옮기다'라는 번역은 가능하다.
(참조: A. BOWLING; BDB).
[동의어] (관련성구)
rWs(5493, 수르)
빗나가다, 돌이키다, 떠나다, 제거하다, 끝내다
수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옆으로 빗나가다, 고개를 돌리다, 벗어나다, 떠나다, 제거하다, 끝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00회 나온다.
수르는 많은 경우에 동작, 즉 돌이키는 행위(출 3:3-4, 삿 4:18, 룻 4:1)나 떠나는 행위(민 12:10)를 나타내는 단순 동사이다.
떠난다는 관념은 역시 영적 문제도 포함할 수 있다. 따라서 삼손은"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삿 16:20).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다"(삼상 16:14, 삼상 28:16). 비참하게도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였다고 되풀이하여 말하였다(왕하 10:31, 왕하 13:2, 왕하 13:6, 왕하 13:11, 왕하 14:24, 왕하 15:9, 왕하 15:18, 왕하 15:24, 왕하 15:28, 왕하 17:22, 참조: 왕하 3:3).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그의 백성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났다고 한탄하였다(겔 6:9). 불행하게도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던" 자들은(왕하 18:6) 매우 적었다.
이 어근은 가끔 이스라엘의 배교(변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많은 경우에서 이 어근은 '빗나가다, 돌이키다' turn aside/away로 번역되었다(출 32:8, 신 9:12, 신 11:16). 반대로 '돌이켜 빗나가지 않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사람의 확고부동함을 확증하는 방법이었다(왕상 22:43). 하나님의 뜻을 엄격히 따르는 이러한 행로는 이 어근을 '좌', '우'라는 주제와 결합시키므로 말미암아 자주 묘사된다. 따라서 요시야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왕하 22:2, 참조: 신 2:27, 신 5:32, H29, 수 1:7)고 하였다.
히필 어간에서 '제거하다, 끝내다'는 의미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이다. 아사는 마아가가 계속적으로 우상숭배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였다(대하 15:16, 한글개역, "폐하고"). 히스기야는 우상숭배의 장소와 제의대상들을 제거하였다(왕하 18:4, 대하 30:14).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에게 영적인 해를 줄 것들 즉 이방신들(창 35:2), 모든 악(사 1:16), 포도주(삼상 1:14), 거짓 행위(시 119:29), 거짓 예배(암 5:21-23)를 제거하거나 "버리라"는 권고를 받는다.
수르는 또한 지혜문학에서 자주 나오는데 가장 근본적인 영적 문제에 대하여 사용되어 있는 것이다. 욥(욥 15:30)은 사악한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적 지혜와 여호와에 대한 경외는 사람을 사망의 그물에 벗어나게 한다(잠 13:14, 잠 14:27). 이것은 어린 시절에서 철저히 배워야 하며 그러면 그것이 일생을 통한 귀감이 될 것이다(잠 22:6).
지혜롭게 행하는 길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이다(잠 3:7, 참조: 잠 16:6, 잠 16:17, 욥 28:28, 시 34:14, H15, 시 37:27).
(참조: R. D. PATTERSON; BDB).
[동의어] (관련성구)
ll'[}(5954, 알랄)
들어가다, 들어오다
알랄(동사, 아람어)은 히브리어 알랄(ll'[; , 5953: 끼워넣다, 삽입하다, 밀어넣다)에 해당하며, '들어가다, 들어오다, 밀어넣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회 나온다(단 2:16, 단 2:24, 단 2:25, 단 4:6, 단 4:7, 단 4:8, 단 5:7, 단 5:8, 단 5:10, 단 5:13, 단 5:15, 단 6:10, 단 6:18).
[동의어] (관련성구)
hn:P;(6437, 파나)
돌리다, 돌이키다, 향하게 하다, 쫓아버리다
파나(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돌리다, 돌다, 방향을 바꾸다, 향하게 하다, 쫓아버리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100회 나오며, 칼형으로 가장 많이 나타난다.
파나의 기본 의미는 "돌다" to turn이지만 여기에서 이 단어는 수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컨대 파나가 어떤 방향을 "향하여 돌다"(신 2:3), 또는 어떤 사람이나(렘 50:16) 사물(출 16:10)을 향해 돈다는 뜻도 있다. 나아가서 다음의 의미도 지닌다: "뒤로 돌다"(수 8:20), "로부터 돌이키다"(창 18:22), "주위를 돌아보다"(출 2:12), "기다리다, 기대하다"(학 1:9), "주의를 집중하다, 숙고하다"(욥 6:28), "쫓아내다"(습 3:15) 등이다.
[동의어] (관련성구)
breq](7127, 케레브)
가까이 가다(오다), 제물을 드리다
케레브(동사)는 히브리어 카라브(br'q; , 7126)에 해당하며, '~에 다가가다, 가까이 가다, 접근하다, 가까이 오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역형은 '제물을 드리다'를 의미한다.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bWv(7725, 슈브)
(되) 돌아가(오)다, 회복하다
슈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오며, 칼, 폴렐, 푸알, 히필, 호팔, 풀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형과 히필형에 국한한다.
성경에는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해 주는 관용구들이 풍부하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 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등등. 그러나 인간의 회개 행위에 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이 한 동사 슈브에 포괄되며 슈브로 요약된다. 이 동사는 본질적으로 회개의 두 가지 필수 조건들을 다른 어느 동사보다도 더 잘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필수 조건이란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 어간에서 슈브는 10가지 상이한 의미를 지니며 이 의미들도 각각 다시 나뉘고 그 중 몇몇 용례는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Hollacay). 이 중 두 세 가지는 특별히 고찰해볼만하다.
우선 첫째로,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슈브의 기본 의미 '(되)돌아오다'는 270회 이상 출현한다.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가 몇 번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사라)로 돌아오리라"(창 18:14). 인간이 주체인 경우가 가장 많다: "내가(아브라함) 아이(이삭)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히필 어간에서는 '되돌리다, 다시 가져가(오)다'라는 의미로 87회 등장한다.
둘째로, 종종(120회 이상) 슈브는 일종의 조동사 구실을 하여 둘째 동사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삭이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창 26:18).
셋째로 슈브의 칼형이 지니는 중요한 용법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회개의 의미에서), 또는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죄를 버리고 부인한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배교한다는 의미)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에서 출현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슈브의 칼형이 129회 사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대 인간의 관계를 논할 때 슈브의 히필형은 11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칼명령형) 우상을 '떠나고'(히필)"(겔 14:6).
모든 어간을 고찰하고 난 후 홀러데이(Holladay)는 언약의 문맥에 슈브의 용례가 총 164회 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다수 곧 113회가 고전적/문학적 선지서들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가 그 선두를 달린다(48회).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으로 이사야의 첫 39장에는 슈브의 언약적 용법이 단지 6회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사 30:15을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지 않고 '여전히 앉아 yashab 즉 외국과의 동맹을 끊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는다면 5회 밖에 되지 않음). 나머지 뒷 부분의 27장에서는 단 4회가 발견된다: 사 44:22, 사 55:7, 사 57:17, 사 59:20. 이처럼 우리는 이 두 예언서가 정경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다. 즉 첫째 것은 이 주제에 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으며, 둘째 책은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용례 결핍 현상은 아마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식의, 이 선지자의 어투 때문일 것이다. 매우 통렬하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염려컨대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슈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자기의 계획 속에 혼입시켰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마 13:13 이하).
수많은 구절에서 슈브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다" to return from exil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칼형: 물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나오며(스 2:1, 느 7:6), 그리고 특히 사 10:22, 렘 22:10, 슥 10:9.
히필형: 특히 왕상 8:34, 렘 12:15.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개념과 언약에로의 복귀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어느 형태의 죄이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 만큼의 갱생이었다. 하나님의 그 어느 쪽의 돌아옴이든 허락한다는 것은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구약성경에는 회개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설명이 없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잘 예증된다(시 51). 그러나 백성들에게 '~에로' 또는 '~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요구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죄가 근절할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돌아섬으로써 즉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능력에 의해 죄인이 자기 운명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회개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임의로운 주권적 행동과, 인간이 통회와 슬픔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 결단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죄의 거부와 자기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긍정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V. P. Hamilton; B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