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ABORTION
정의
낙태는 출생 전 자궁 속에서 태아의 생명이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몇몇의 경우에는 질병에 기인한 자연적 유산이 있다. 그러나 현재 ‘낙태’라는 용어는 인간의 고의와 개입을 포괄하는 인공 유산을 더 자주 가리킨다.
특별히 전반적인 면에서 인간이라 볼 수 없는 태아의 보호는 불필요하다고 판결한 1973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 낙태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왔다. 낙태에 대해서는 개인의 결정이나 목회적 돌봄, 정치적 책임, 일반적 문화 관습에 비춰 이 문제를 다뤘다.
낙태의 쟁점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야기한다.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사람 됨’은 언제부터인가? 한 인간의 생명을 결정짓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인간 존재가 가지는 권리는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인공 유산을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낙태가 좀처럼 부도덕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 나머지 사람들은 다양한 경우에 이것이 낙태인지 아닌지, 이것을 낙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식별하는 두 간극 사이에 빠져 있다. 이 쟁점에 대한 최선의 방법은 의학, 심리학, 정치, 법률, 철학, 성경, 신학, 실천적 지혜를 동원하여 씨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정의와 실천을 제공하는 열쇠로 성경과 신학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낙태와 관련하여 어떤 명시적 가르침도 제시하지 않는다. 고대 앗수르(아시리아)인들의 법률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유산한 어느 여인을 비난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와 같은 법률이 없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저작들은 낙태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신약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마술과 영아 살해에 대한 낙태를 비판하고 있다(디다케서 2장 2절, 바나바 서신서 19장 5절을 보라).
궁극적으로 우리는 생명, 인간 본성, 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성경의 보다 일반적인 가르침에 주목함으로써 낙태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생명의 호흡’, 숨을 불어넣으셨다(창 2:7). 우리는 생명의 창조자가 아니라 청지기이므로 우리가 태아의 생명을 결정짓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 속한 한 존재의 삶과 죽음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취하려는 것과 같다.
더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인간 존재의 창조 후,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신다(창 1:31).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존재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창 1:27–28, 9:6; 시 8:3–8).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소우주를 형성하며, 지상 통치에 육체적으로, 천상 통치에 영적으로 참여한다. 하나님은 또한 파트너로서 인간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피조물을 돌보는 구별된 역할을 주셨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한 인간 생명으로 인정하는 몇몇 문화들은 인공 유산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장애가 있거나 원치 않는 아이의 유기(遺棄)를 허용한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들에 대한 희생적인 돌봄 대신 선택하는 유기와 낙태, 둘 다 거부한다. 비록 하나님이 자궁 속에 든 생명을 인정하며, 자긍하고 계심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발견할 수 있지만, 성경은 인간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출 21:22; 시 139:13–16; 눅 1:44).
우리의 영/육의 본성과 하나님의 창조 관리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하나의 행위로 귀결된다. 성교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공헌하는 것이다(창 4:1). 그러므로 결혼과 섹스는 하나님에게 신성한 것이며, 거룩하고 생명을 가져다주는 제도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생활의 신성함을 인식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살전 4:3–8; 히 13:4). 인간의 성생활은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을 공동 창조하는 수단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인공 유산에 대한 어떤 명시적 교훈도 제공하지 않지만, 생명과 인간 본성, 그리고 성생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우리를 모든 순수한 인간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끈다.
적용
첫째, 낙태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 공동체가 씨름해야 할 과제다. 관대한 낙태법 앞에 놓인 우리의 현실은 교회로 하여금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면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제자 됨을 확립할 것을 촉구한다.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기꺼이 치유에 필요한 돌봄을 제공해야 하며, 우리 사이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과 고심하는 부모, 둘 모두의 고통을 포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낙태의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보기 위해 이 문제를 둘러싼 현대의 언어적 논쟁을 초월해야 한다. 인간의 성욕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남성이 성교의 신성성을 이해하기까지, ‘아버지의 마음’이 ‘그들의 자녀들에게로’ 돌이켜지기까지(말 4:6)는 낙태 뒤에 놓인 얼마간의 부주의한 성적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생명의 공동 창조자로서, 그리고 창조의 관리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적인 죄를 피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문화는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을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셋째, 점점 더 선진화된 의료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낙태 윤리의 복잡성을 통해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개념에서? 착상에서? 태아의 생존에서? 태어남으로써? 무엇이 우리의 인간임(물리적, 심리적, 사회적)을 이해하는 가장 중심된 요소인가? 의학 기술 발전과 더불어 우리는 기형적 태아의 문제를 예상할 수 있다. 진보된 의학 지식이 낙태와 관련한 우리의 결정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의 근본적인 주제의 빛 아래에서 낙태에 대해 제기된 새로운 질문에 대한 평가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또한 공공의 정책적 현안으로써 낙태를 다루어야 한다. 무엇이 태아를 고려한, 혹은 태아의 부모를 위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혼재된 국가의 책임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공공 정책의 수립에 참여하는가? 어떤 전략은 이용해야 하고, 또 어떤 전략은 피해야 하는가?
생명의 복음을 존중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명을 공급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며, 태중의 아이들과 파탄을 맞은 부모들을 돌보는 것이고, 올바른 성적 관계를 존중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이런 사고와 실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양육할 수 있다.